오늘 서재에서 20년이 된 낡은 종이에 그려진 젊은 날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몇 번의 이사로 방치해 두다시피한 40대 초반 나를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을 보노라니 그리움이 아련히 떠오른다. 20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삶이라는 빠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한 30대의 젊은 청년이 한 장의 종이에 남겼고, 그 붓끝마다 그의
- 이현순(진이)
오늘 서재에서 20년이 된 낡은 종이에 그려진 젊은 날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몇 번의 이사로 방치해 두다시피한 40대 초반 나를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을 보노라니 그리움이 아련히 떠오른다. 20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삶이라는 빠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한 30대의 젊은 청년이 한 장의 종이에 남겼고, 그 붓끝마다 그의
“약만 타서 올 거야! 식사는 갔다 와서 하자. 배고프면 과일 한 조각 먹든지….”남편이 집 근처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면서 한 말이다. 이게 뭐지. 그날은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깊고 단단한 마음이 깃든 듯 들렸다. 사랑은 커다란 고백이나 거창한 선물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기댈 수 있는 믿음과 신뢰가 담겼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
가을빛을 머금은 찬란한 햇살이 창가를 스치며 천천히 강의실을 물들인다. 정돈된 책상과 의자 위로 금빛 빛줄기가 길게 드리워지고, 아직은 텅 빈 공간에는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다. 햇살을 따라 창가를 부유하는 먼지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오후의 이 정적은 곧 시작될 무언가를 기다리는 풍경이다.이윽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침묵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달아오른 그들의 눈빛은 한 곳을 향했다. 다농관 다뤼 회랑으로 향하는 계단 최정상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이 서 있었다. 조각상 주변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곳곳에서 낯선 이와 부딪치고 동선이 엉켰다. 그러나 그만한 접촉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쳤다. 당당히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진하듯 서
환자 셋은 하늘로 치솟고 싶어 하는 한 묶음의 풍선 같았다. 그들은 조금 전부터 취중에 오가는 말이 들뜨기 시작하더니, 오늘 퇴원한 서씨 아저씨가 두 손을 펴 머리를 빠르게 쓰다듬으면서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70대 중반의 애칭이 ‘큰형님’은 바로 손뼉 속도에 맞는 흘러간 노래를 뽑았다.“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신입 환자 강씨는 멀뚱하게 앉
“아이고, 오늘도 안 피네!”“꽃잎이 조금 더 벌어졌나요?”“아니, 그대론데.”아내 성주가 몹시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조금도 변화가 없나요?”건우가 물었다.“어제 그대론데…. 야, 너 이름 바꿔야겠다.”“뭐라고 바꿔?”“약백합이라고 이름을 바꿀 거야.”“약백합? 약초는 아닌데….”“약초 말고, 꽃은 안 피고 사람 약만 올리는 백합.”&n
가끔 집 가까이 있는 병영성에 간다.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은 울산광역시 중구에 축조된 조선시대 병마절도사 영성이다. 1415년(조선 태종 15) 경주에서 현재의 병영성으로 경상좌도 병마절제사 영이 이설되었다고 한다. 1417년(태종 17)에 석축 성으로 축조된 후 1426년(세종 8) 경상 우병영 성과 일시 합치되었고, 1437년(세종 19) 다시 좌도 병
51:49 단지 숫자 쌍일 뿐이다. 100이라는 완전한 수를 반으로 나눈 50을 기준으로, 하나는 1을 더 가졌고 하나는 1을 덜 가졌다. 수학적으로는 미미한 차이지만, 인간사에서는 세상을 나누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1이라는 작은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좌절이 된다.노조 일을 하며 이런 조합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결정을 앞둔 순간
백일홍 세 번 피면 나락은 익는다는데*그 꽃이 피기도 전 조세 통지 먼저 닿아 배들평 넓은 벌판에 먹구름이 일었다지 감세를 간청하는 갈라진 손바닥엔오랏줄 굵은 올이 살을 파고 피가 터져 갑오년 말목장터에 노대바람 거셌다지 쇠백로 긴 부리로 허기진 놀 휘휘 젓는, 만석보 허물어야 제 길 찾아드는 물길 동진
야구장 관람석으로 날아온파울 볼 주워 보니겉가죽에 기워 놓은백여덟 매듭실밥이 도드라져 보인다 약간은 닳아버린 봉제선(縫製線)이지만 한 땀 한 땀 꿰맨속 깊은 다짐장인(匠人)의 손끝에선 명품이었다가 투수의 빈주먹을 먹여 살리고이제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릴 때장난치다 상처 난 곳에 꿰맨 실밥 아문 자리가&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