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황룡사지(皇龍寺址)가 보인다. 드넓은 터에 백일홍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커피를 한잔 들고 밖으로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인다. 너른 들판과 나지막한 산자락으로 하늘이 높게 보인다. 그 아래 80여 미터 높이의 탑과 불국사 여덟 배 크기의 절이 있었다니 그 크기를 상상하기 힘들다.들어서는 길은 보도블록을 깔아두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라고 네 개를
- 배문경
창밖으로 황룡사지(皇龍寺址)가 보인다. 드넓은 터에 백일홍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커피를 한잔 들고 밖으로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인다. 너른 들판과 나지막한 산자락으로 하늘이 높게 보인다. 그 아래 80여 미터 높이의 탑과 불국사 여덟 배 크기의 절이 있었다니 그 크기를 상상하기 힘들다.들어서는 길은 보도블록을 깔아두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라고 네 개를
어느 날 소포 하나를 받았다. 수신인 주소는 분명 우리 집인데 발신지는 Germany이다. 독일에서 우리 집에 소포 올 일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소포를 뜯어보기가 망설여졌다. 영화적인 상상으로 이상한 것이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남편에게 온 것이지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열어보았다. 꼼꼼한 포장을 벗기니 장식용 접시, 사탕, 초콜릿,
어느 날 문득, 내 안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무늬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종일 서재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문밖으로 끌어내던 힘. 누군가는 방랑벽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역마살이라 부르지만,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부름이 얼마나 깊고 확실한지, 길에 나선 내가 얼마나 자연에 동화되어 평온하고 행복해하며 깊은 사유의 뜰을 넓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길었다. 인내의 한계점에 다다른 그즈음, 맑은 하늘에 온몸을 맡겨도 좋을 만큼 하늘은 바닷빛처럼 파랬고 태양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도시를 벗어나자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늑하고 아련하고 몽환적인 흔적을 지워 가며 기차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빛을 향해 달려갔다. 대지도 하늘도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완연히 푸른빛으로 풍성했다.기
팔십 세 나이를 산수(傘壽)라 하고, 여기에 한 살을 더하면 구십(九)을 바라본다고(望) 하여 망구라 한다. 할망구란 이런 연세의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어느덧 내 나그네 인생길이 산수의 언덕에 이르렀다. 돌아보면 실로 아득한 세월이다. 그날들을 채운 숱한 사연이 기억 속에 쌓여 있다. 그중에는 보석 같은 사연의 추억도 많이 있다. 가슴에 간직된 추억은 머릿
신림역 스크린 도어문에서 「정년퇴직」 시를 읽었다. 그 시를 읽는데 마음이 울컥해졌다.“정년퇴직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책을 가슴에 묻고 부화를 꿈꾸며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며… 타인의 삶을 곁눈질하며 펼쳐보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이 새롭게 도전하는 환승역이다.(2025년 시민공모작 김화순)”3월 첫 주일, 교회에서 장로 은퇴식이 있었다.
작년 10월 말일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허리 옆구리에 담이 결리며 온몸이 아파 거동이 쉽지 않았다. 얼마 전에 등에 담이 들어 파스를 붙이고 나았던 터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소염진통제를 먹으니 그나마 아픔이 약해졌다, 마치 나아지는 것처럼. 그러나 일주일 만에 약을 끊으니 아예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불편함 속에서 낫기를 기다리며
어릴 적 나는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금도 돈암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길과 초등학교 가는 길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어반 스케치 그림을 그리면서 건물들, 특히 옛집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아른거리지만 설레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특히 돈암정은 꿈속에도 종종 나타나곤 했다. 돈암장은 담이 높
거스를 수 없는 육신의 노쇠 때문인지 올해 날씨는 유난히 춥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조차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봄날의 꽃구름, 가을 단풍을 선사하던 벚나무 가로수와 뒷산의 온갖 활엽수는 나목이 되어, 후려치는 칼바람과 맞서 싸우느라 귀신울음 같은 비명을 허공으로 흩뿌리는 동지섣달 엄동설한. 사철 푸른 소나무도 재선충이라는 희소병에 백약이 무효인지 누렇게
요즘은 무엇이든 기계가 대신해주는 시대다. 글의 교정도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금세 해결되는 세상에서, 한 어른의 시조집 교정을 부탁받았을 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잘 모르는 분인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문협 회장님의 간곡한 청에 마음 한켠이 움직였다.그날, 카페 창가에 앉아 처음 마주한 분은 백발의 노신사였다. 조심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