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지? 죽기 전에 조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겨.” 아침 출근길에 항암 치료 중인 막내고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소설(小雪) 추위에 손돌바람이 분다. 목도리를 여미고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고 걸음을 옮긴다. 고모의 목소리는 쓸쓸한 늦가을에 떨어진 낙엽처럼 버석거렸다. 자식들에게 신세 지기 싫다고, 겨우 두 다리만 뻗을 정도로 작은 모퉁
- 정택영
“잘 지내지? 죽기 전에 조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겨.” 아침 출근길에 항암 치료 중인 막내고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소설(小雪) 추위에 손돌바람이 분다. 목도리를 여미고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고 걸음을 옮긴다. 고모의 목소리는 쓸쓸한 늦가을에 떨어진 낙엽처럼 버석거렸다. 자식들에게 신세 지기 싫다고, 겨우 두 다리만 뻗을 정도로 작은 모퉁
“혹시, 이 교수님 아니신지요?”무언가 은밀한 일을 도모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낯선 듯 익숙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이름을 선뜻 떠올리지 못해 무안해할 그를 배려하려 “낯은 익은데 성함이 잘…” 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00학번 경제학과 제자이자 현재 지점장으로 근무 중이라는 그는 내 수업을 두 강
미시령터널을 빠져나오면 시원하게 트인 검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내리막길을 따라 6·25 전시에 특수 활동을 하던 유격군 부대의 수련장이 보인다.지난 추억에 젖어 계속 가다 보면 어느덧 바닷가 ‘아바이마을’에 이른다. 예전 같으면 전우들이 나와 반겨 주었을 것을 다들 고인이 돼 떠나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담 곁에는 예전처럼 오징어가 널려 있어
현충일을 시작으로 재량휴업일과 연계하여 며칠간의 짧은 방학이 주어졌다. 이 기간을 백분 활용해서 손녀를 돌봐줄 계획을 세웠다. 뜻밖의 휴가를 보내게 된 딸아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약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 지역에 떨어져 사는 이유로 딸아이의 육아를 돕지 못하는 미안함이 늘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주말에는 사위가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도와주고 있기는 해도
5월 말의 ‘연산동고분군’은 밤꽃 향기로 덮여 있었다. ‘나, 밤나무가 바로 여기에 있어, 찾아봐 줘’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무심코 지나치는 과객을 불러 세우는 강렬한 끌림이었다. 나뭇가지마다 자잘하고 몽글몽글한 흰 꽃들이 작은 포도송이처럼 한가득 달려 있었다. 그 수수한 모양새 뒤에 숨은 짙은 향기는 지나가던 이의 발걸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경주의 왕릉
미국에서 손자가 왔다. 목마르게 만나길 기다렸던 손자가 내 눈앞에 서 있는 순간, 모든 햇살이 반짝 그의 존재를 비추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미국 가서 만났을 때 “할머니, 사랑해요” 하고 어눌한 한국말로 말했던 꼬마는 사라지고 길고 단단해진 몸을 가진 대학생이 서 있었다.“안녕하셨어요? 할머니!”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데, 그동안의 오래된 세월이
부소산성을 찾았다. 부여를 지날 때마다 한 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이었다. 몇 차례 먼발치로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소망을 이루었다.야트막한 산길에는 소나무 향이 그윽했고 산새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가셨다. 백제의 옛 도읍지를 걷는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문득 삼천궁녀 이야기가 떠오르자, 마음 한편이
간밤에는 조금 특별한 꿈을 꾸었다. 우리 마을 밭 한가운데에 무대가 세워지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연예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는 그들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발끝으로 언덕 같은 둔덕을 올랐다.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며 공연에 빠져들던 순간,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수진 엄마, 일어나야지.”남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새
두 달째 박경리의 「토지」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오랫동안 읽고 싶었고, 읽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작품이다. 2부 중반, 혜관 스님과 동학군으로 활동하던 윤도집(都執)이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1910년을 전후로 일부 불교계 인사들이 벌인 친일 활동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두 사람 다 당시 비밀 결사 항일 투쟁을 벌이던 인물들이다.
지난겨울 잠시 일본에 갔을 때 그곳의 한 신사에 가게 되었다. 일주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쵸즈야’라는 의식을 행하는 자그마한 옹달샘이 있었다. 12월 추운 날씨에도 참배객들은 샘 옆에 놓인 조롱박으로 물을 떠서 왼손부터 오른손을 차례로 씻고 입을 헹구고 들어들 갔다. 물때 앉은 검은 돌과 샘 주위를 보니 오랜 신사의 역사와 함께 흐른 자연 그대로의 샘물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