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핀 벚꽃 그늘에 앉은 그녀는 자주색 가방을 부둥켜안고 있다. 자신이 빠져나온 집을 올려다보는 듯 뚫어져라 정면을 응시한다. 하얀 머리와 분홍 스웨터가 연분홍 꽃들과 어우러져 화사하다. 미영은 그녀 앞에 차를 바짝 세운다. 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애초부터 그곳에 부착된 조형물 같다. 미영은 조수석 유리창을 내리고 ‘엄마’ 하고 부르려다 말고 차에서
- 조규남
활짝 핀 벚꽃 그늘에 앉은 그녀는 자주색 가방을 부둥켜안고 있다. 자신이 빠져나온 집을 올려다보는 듯 뚫어져라 정면을 응시한다. 하얀 머리와 분홍 스웨터가 연분홍 꽃들과 어우러져 화사하다. 미영은 그녀 앞에 차를 바짝 세운다. 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애초부터 그곳에 부착된 조형물 같다. 미영은 조수석 유리창을 내리고 ‘엄마’ 하고 부르려다 말고 차에서
상공회의소 앞 먹적골 골목, 노란 안전띠가 드리워진 대지 칠십여 평의 빌라 공사 현장에 여러 사람이 모여 고사를 지내는 게 보였다. 약간의 오르막길 좌편에 이빨 빠진 것처럼 휑한 현장 주위는 도로 옆으로 난 통로만 빼놓고는 이삼 층 주택이 디귿자 형태로 즐비했다. 입구에 세워진 공사 안내판에 적힌 빌라 이름은 메트로빌. 며칠 전, 낡은 집 두 채를 철거하고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휴가는 아들이 효도한다는 차원에서 서해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자동차로 땡볕을 피해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음이 느긋해지자 문득 아들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생각을 넌지시 물어보았다.“넌 첫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지나간 과거일 뿐 별 의미는 안 둬.”“넌 보고 싶거나 궁금하지 않니?”“그 얘기는 왜 해? 다
신문기자를 만났다. 유명하지 않은 이곳 지역신문인데, 거의 혼자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그런다고 기자가 말했다. 그 기자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취재원을 앉혀 놓고도 장난하듯 대했다. 묻는 것도 두서없다. 카톡을 보며 문자 대화를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질문을 했는데, 홍 기자라는 여자는 엉뚱하다 싶은 것을 물었다.“혹시 심심하지 않으세요?”“의사가 심심
등장인물_ 정순(여, 55, 민박집 주인, 태봉 처)|태봉(남, 59, 정순의 남편, 실어증)|유미(여, 28, 상철의 딸, 동준의 여친)|동준(남, 30, 골프장 주인 아들, 유미의 남친)|상철(남, 35, 살아 있다면 59세, 회상 속 인물, 유미의 아버지)|사내(남, 40, 정체 불명의 사내, 회상 속에 등장)때_ 현대, 큰 사건 이후 20년쯤 지난
1.필자는 최근 우리나라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부를 아우르는 『한국 현대시인 열전』(국학자료원)을 펴냈다. 여기서 다룬 시인은 모두 29명인데 계간 『미네르바』의 기획으로 한 호에 두 시인을 다루었으니 거의 3년이 걸렸다. 문단적 사건이나 에피소드들을 수집하는 등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힘들고 먼 길이었다.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1960년대 활동한 분들이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다. 일이 끝나고 인천행 전철을 타려던 발길을 개찰구 앞에서 멈춘다. 서울에 올 기회가 흔치 않은데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마음에 두었던 곳이 생각났다. 짧은 겨울 해가 어중간하였으나 걸음을 재촉한다.성균관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할머니 세 분이 명륜당 서쪽 마루에 걸터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이웃집 툇마루에 마실 온 듯
소설은 사실 또는 작가의 경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이야기다. 소설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고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한국 최초의 소설은 김시습의「금오신화」, 허균의「홍길동전」, 최치원의「최치원」이라는 주장이 있다.문학의 장르마다 작가들은 나름 자부심과 긍지를 품고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소설가를 가장 존경한다.
비행기가 수시로 머물고색색의 머리칼과크고 작은 발자국들이 뛰어다니는그 곳이섬이란 걸 가끔 잊는 것처럼 네가 섬이란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가시오가피 소곤대는 길을 걸으며개망초 하얀 웃음소리가 들리는그저 파도가 지저귀는 바닷가이겠거니 가닿을 수 없는 수평선 끝을날갯짓만으로 가는 나비가너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고난 후
나는 상자예요.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있는. 그러나 다녀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아요. 상자도 그림자는 가두지 못하니까요. 밤이 되면 그림자는 투명해지니까요. 어떤 사람은 버려진 것도 그림자였다고 수군거리더군요. 상자에는 그림자도 많아요. 고양이 그림자도 있고 애인에게 받은 꽃 그림자도 있고 아기 그림자도 있어요. 그림자는 그림자이니 그냥 봄밤에 펄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