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마지막 날, 세상은 백지같이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더미 사이로 치킨집 홍보 전단지를 돌리던 닭 인형탈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에, 치킨집 앞을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나는 그 인형 앞으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인형 안에 있을 할머니의 얼굴이 비쳐 보였으니까.
- 김재현
12월의 마지막 날, 세상은 백지같이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더미 사이로 치킨집 홍보 전단지를 돌리던 닭 인형탈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에, 치킨집 앞을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나는 그 인형 앞으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인형 안에 있을 할머니의 얼굴이 비쳐 보였으니까.
하교 후 돌아온 집엔 아무도 없었다. 거실불을 키자 아빠가 늦은 흔적들이 보였다. 채 닫지 못한 서랍이며 지갑도 두고 나간 듯했다. 식탁 위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마치 글씨가 포스트잇에서 떨어질 것 같이 끄트머리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적혀 있었다. 아빠의 필기 습관이었다.어린이날에 같이 저녁 못 먹을 거 같네. 늦게 말해서 미안.그 뒤로도 공휴일이
시대의 열차 위 느린 악곡이 흐른다도레미파솔라시 일곱 가지 음정이기억처럼 쌓여 가는 자리그곳에서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악보를 완성해 간다 어릴 적 지낸 할머니 댁에서는내가 먹다 흘린 아이스크림 자국을 스타카토로 꾸며 내던 당신이 계셨고그게 재미있어 자꾸만 낙서 같은 자국들을 남겼던 거야 두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선로가 멀어지고자국이
학원에 가기 전편의점으로 들어간다 이미 자리를 잡고 컵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들엄마한테 혼난 이야기를 하며젓가락을 까딱거리고나는 가장 싼 삼각김밥을 찾기 위해계속해서 삼각형의 순서를 바꾼다 고개를 돌리면 소란스럽던 아이들이흘린 라면 국물 대신 입가를 닦아내고편의점 앞 비둘기를 쫓아내지 못하는 스무 살 알바생처럼 가격표 앞에서 연약해
선선한 햇빛이 들어오는 늦은 오후어머니는 젖은 행주를 접어두다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열린 창문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들려오고오월은 바람에 섞여 잡안으로 들어온다 어머니의 얼굴 위로는 따스한 햇빛 한 조각이하얀 꽃잎들처럼 가볍게 내려앉고하얀 새가 잠시 쉬었다 날아간 어머니의 곁은희게 번지는 찔레꽃처럼 어느새 조용히 만개해있었다&nbs
햇살이 스며드는 오월의 봄날색 바랜 간판을 단 은수 사진관유리창 너머 초점이 나간 듯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반사판 아래 드리우는 그림자바퀴가 고장 나버린 의자 위에걸터앉은 아버지가 있다흰 배경지 앞에 앉는 사람들아버지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터져 나오는 플래시 불빛인화지에 사람들의 얼굴이 스민다나를 의자에 앉히고는 조여 보는 조리개 나는 오월에 생긴
고물상 뒤편에는 버려진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햇빛이 쨍하게 비추는 날씨에도 아빠는 그 한가운데에서 일을 멈추지 않았다. 폐지 더미 위에 또다시 폐지가 쌓이고, 그 위로 알루미늄 캔과 고철들이 층을 계속 이루고 있었다. 아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망가진 가구들과 캔들을 분류했다. 나는 그런 아빠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고물상 일을 하
내가 사는 마을엔오일장이 선다추위를 견디고 있는플라스틱 바구니에가득 담긴 사과들 나는 한 바구니를 집으로 데려왔다 하얀 도자기 위에반달 모양의 속살이가지런히 포개져 있을 때계절차를 끓여 놓고 앉아조용히 말을 건넨다 사과야나를 만나기 위해참 먼 길을 돌아왔구나 꽃봉오리 속초록 점 하나로 계절을 넘기고바람과 비와 햇빛을 지나
화단에 아름답고예쁜 꽃을 심으면만개했을 때는보기에도 즐겁고 향기롭고좋아 보이지만꽃은 언젠가는 진다 가슴에 마음에 꽃을 심자누구를 위한 꽃세상을 위한 꽃사랑을 위한 지지 않는영원한 마음에 꽃을
넘기지 못하는 약을드셔야 살 수 있다고다음 생엔 엄마 딸 안 하겠다고 그 모진 말을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날 그날의 말이가시가 되어지금까지 가슴에 박혀 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내 마음은 삭지 못한 채세 번째 기일을 맞고이제 그만이라선을 긋는 마음이오히려 나를 더 아프게 밀어낸다 엄마가 살던고향 그 집이 떠올라&n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