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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은퇴자로 사는 날은

퇴색한 시간들이 추억이 된 사진 한 장유통기한 지난 책장 오늘도 다시 열며오래된 내 명함 뒤에 전(前)자를 새겨본다. 몇 해 전 넥타이에 한나절을 동여매며등굽은 고목 같은 허리를 다 감추고기별도 없는 친구를 부른 듯이 찾아간다. 자진모리 장단으로 살아온 하루들을이제는 감지 않은 벽시계 태엽처럼천천히 내 길을 따라 곡선으로 살아간다.

  • 김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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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난실을 바라보며

난실을 바라보며 인간사 생각는다아들 하면 아들로 친구 하면 친구로구태여 나가지 않아도 다 보여서 수월하다 난실을 바라보며 대천계 생각는다매월당 청광삭파 이제 나도 트인가일미리 유리 한 장이 이승 저승 간막인져 여기 온 지 팔십삼 년 좀이 슬슬 쑤신다 농사일 지켜울 때 한 번씩 가던 서울흰구름 저 오가는 길처럼 이 몸도 가벼워져

  • 김종환(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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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눈송이

1훈은 종이상자를 좌판 위에 올려놓는다. 창고에서 가져온 상자는 조금 큰 것도 있지만 대개 크기가 비슷하다. 그 상자는 일반의약품이 든 것으로, 피로 해소나 체력 증진의 효과가 있다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훈은 가위를 집어든다. 손에 힘을 주어 중앙을 자른다. 처음에는 가위질하기 힘들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종이 잘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나고

  • 방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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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미녀도(美女圖)

1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비추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동네 개들이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달리는 속도에 맞춰 심장 박동도 점점 가빠졌다. 경택은 더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멈춰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위는 여전히 달빛에 젖어 있었다. 그는 달빛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개울을 건너고 들을 지났다.다시 잠시 숨을 고른 경택이 걸음을 재촉

  • 정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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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그림, 자(者)

카페 사장이 무소르그스키의 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층 전체를 갤러리로 사용하는 카페 ‘그림자’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꼭 들른다. 나뿐 아니라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단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러 온다기보다는 허전함을 채우러 온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벌써 입구를 들어서면 어깨에 멘 가방끈이 바닥으로 밀려 내려가고 그것을 놓치

  • 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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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경태 이야기

“우리 경태가 집을 나간 지 사흘째 됐는데 연락이 안 돼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기자님이 좀 찾아주세요.”경찰서 근처의 커피숍. 경태 모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붉고 푸른색으로 반들거리는 긴 손톱, 가슴골이 보일락 말락 드러나는 꽃무늬 원피스 등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는 여전했지만, 표정은 간절했다. 경태 모가 서 기자의 손이

  • 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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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참꽃 귀신

“부장님! 승진 축하드립니다.”듬직한 정 팀장이 손에 핏줄이 생기도록 세게 악수를 했다. 정 팀장은 이번에 과장에서 팀장으로 승진했고, 난 팀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했다.그때였다. 김 양이 차를 갖고 들어왔다. 그녀가 찻잔을 놓으면서 말했다.“부장님! 이번 봉사활동을 어디로 가죠?”“그래, 이번 달에는 봉사활동 가는 달이지. 그래 갈 만한 곳을 정 팀장이 물색

  • 우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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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9 76호 소설가 대돌 씨의 K-신선 프로젝트——험난한 세상 신선처럼 살기

대돌 씨는 7학년 6반이다. 100세를 산다 해도 3/4을 넘게 살았다. 90세를 산다면 15/18를 넘게 살았다. 나름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인생 목표를 무병장수하며 신선처럼 살기로 정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를 전제로 여러 가지 목표를 다양하게 추가하였다. 곧 죽을 게 아니고 오래 살 생각을 하니 미래에 계획을 세울 내용도 많고 목표도 다양해졌다.

  • 오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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