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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겨우살이

아시다시피 겨우, 살아가요참나무, 물오리나무, 벚나무, 팽나무에 빌붙어 주목처럼 주목받지 못해도산 중에서 뭉치고 뭉쳐서 악착같은 더부살이로그나마 푸르르게 겨울을 나지요 곁에 있는 걸 감고 올라간 후가차 없이 제 뿌릴 잘라버리는 새삼가루받이할 때 부들부들 떠는 부들뿌리 없이 공중에서 살아가는 에어플랜트지금이란 게, 이런 고군분투의 결국이잖아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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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올이 풀린 그림자가 나를 본다

검은 벽 위의 액자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지 가까이 가지 마세요 만지지 마세요여기는 침묵이 말을 하는 장소 고요한 냄새가 흐르는핀 조명 아래 관람객은 도슨트를 따라반도네온의 주름처럼 열렸다 닫히곤 했지 벤자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가는 생성과 소멸의 시침은 빠르거나 느리거나, 돌아가고 그는 그림을 글로 말하고 있었지

  • 위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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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26.5 687호 꽃봉오리 그렁그렁

멀리서 보내온 소식이 내심 고맙기도 하지만꽃을 피우려는지아기 품은 어머니처럼 은근히젖 냄새가 나 없는 사람이 버린다는 건 그래도 봐줄 만하지만 가진 사람이 비운다는 건생목숨 겪는 것만큼이나 아픈 일이거든 절절한 고백이 아니었으면 해나에게 고백하는 것보다너에게 하는 고백은 늘 과장되어 있거든 멀리서 보내온 소식이 고맙기도

  • 조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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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꽃수를 놓는 마음으로

나의 섬은여전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지상으로 솟아올라세상을 조율할 수 있기를 촉을 세워 내일을 읽어가는마음 열 수 있기를 천릿길을 한걸음부터 다북다북걸음수를 늘릴 수 있기를 서두르지 않아도세상 넘어 이쪽에서 저쪽까지가닿을 수 있기를 유유자적 삶을 꿰매는바늘과 실로생의 꽃수를 놓아가는아름다운 발자국을 새겨가는

  • 이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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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26.5 687호 굽은 마디에 핀 꽃

오십오 년 전,수줍게 내 손을 잡던 그 보드랍던 손설렘의 온기만 머물던 작은 손이제야 눈을 씻고 들여다봅니다 희고 고운 결 위에언제 이렇게 깊은 골이 패었을까세 아들의 울음을 달래고내 고단한 어깨를 토닥이던 그 손마디마디는 산맥처럼 불거져 나와세월은 아픈 지도를 그려놓았습니다 물기가 마를 날 없는 일상의 강가에서마디마디 굳어진 헌신의 흔적

  • 김훈동(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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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진우네 베란다 식당

날이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했어요. 목련도 영산홍도 다 떨어지고, 아파트 담장에 장미가 많이 피었네요. 오늘은 아빠랑 모처럼 집 근처 일봉산 공원에 가기로 했어요. 진우는 그 공원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주 넓고 놀이기구도 많거든요.한동안 아빠는 늘 바쁘다고 했어요. 휴일에도 일하러 나가거나, 누굴 만나러 갔습니다. 오늘은 엄마가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아빠랑만

  • 한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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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엄마의 병풍

우리 집엔 병풍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쓰다가 우리 집에 남겨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가 결혼할 때 외갓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엄마는 원래 집에 있던 것보다는 외갓집에서 가져온 병풍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병풍은 황토색 누빔으로 된 싸개 안에서 엄마의 장롱 옆에 서 있었습니다. 자랑스럽게 서서 늘 편히 쉬었습니다.그날은 할아버지 제

  • 김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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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연화굴의 여백

주왕산의 풍경이 낯설 만큼 새롭게 다가온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듯, 산 또한 또 다른 얼굴로 나를 맞는다. 그 변화 속에서 흘러간 시간만큼 나 또한 달라졌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젊은 날 주왕산은 친구들의 웃음으로 가득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산에서는 자연이 품은 전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바위에 얽힌 이야기와 굴속에 깃든 기도는 계곡의

  • 김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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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 687호 아버지의 얼굴

공주의 제민천 옆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낡은 시멘트 담벼락 위로 불쑥 솟아오른 얼굴 하나와 마주치게 됩니다. 대나무로 엮어 만든 그 얼굴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하나의 문이자 느닷없이 열린 출입구입니다. 처음 보는 이에게 낯설고도 친근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린 그 얼굴 앞에 서면 어이없는 풍경의 반전에 발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마치 누군가 오래전부

  • 석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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