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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새로운 시작

깊고 짙은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빛이 힘을 잃고 빨랫줄에 걸린 빨래같이추녀에 나란히 걸려 낮잠을 자는상쾌한 아침에 밤샘 불침번 서던 수탉이 배곯음에추녀에 매달린 별빛 모이를 향해긴 목 빼어 먹으려 하지만 그때마다헛부리짓에 마음 상한울부짖음의 대기 진동이안방 창문 문풍지를 울리는 좁은 틈 사이로 여명이 스밈 동시에&n

  • 박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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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그대 떠난 자리 달빛마저 시들고——소설「달」*에게

젊은 시인이 산속에서 환생했다 근처 산사 종이 울릴 때떨어지는 산벚꽃잎이 나비 되어 되날아오르고그 나비가 독뱀이 되었다시인은 새벽 달빛 아래한 줄의 시어인가, 아포리즘인가 -최선(最善)이 최악(最惡)이다 그때 독뱀이 물었다 이리 비틀 저리 휘청 지나던 노승이 거두어 업고공몽(空될)의 억새 숲을 헉헉댔다 회복기에

  • 김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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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가을 햇살에 감잎 지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어딜 가냐며 속삭인다걸음 멈추고 돌아보는데아무도 없다 두리번거리며고개 들어 올려다보니저 꼭대기 흔들리는 가지 위에 햇살이 앉아 웃고 있다 어깨를 다시 툭 친다너였구나, 감잎아직 이른데물먹은 햇살 사방으로 흩어진다 툭 툭 툭콘트라베이스 선율이 흐르고 새파란 감잎가을 햇살에 지고 있다

  • 최인화(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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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조용한 숨결 하나

입 하나로 살아가는분을 알고 있다그는 반듯하게 닦인 길보다구질구질한 뻘밭을 좋아하며제 발자국 남기기를 좋아한다가만히 꼼지락을 들여다보면그가 갯벌에 시를 쓰고 있다는 걸알 수 있다그분의 입은 늘 굳게 닫혀 있다그는 누구나 가진 집 한 채 없어서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닌다가끔씩 입속에 연분홍빛 새끼 뱀을키울 때가 있다그는 새끼 뱀을 붓처럼 꺼내어썰물과 밀물을

  • 김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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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가장 난해한 화법

생일은 무슨? 올 거 없다 바쁜데…용돈은 뭘? 너도 힘들텐데… 전선 너머로 늘 반복 들리던‘괜찮다’로 일관된 손사래 말씀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종결어미가 생략된 두루뭉수리 그 모호한 은유의 깊이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어스름이 저녁의 목덜미로 기어오르는 적막한 행간에서 그때는 몰랐던 어머니의 무거운 외로움이 슬며시내 어깨를

  • 지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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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철로변 사진

순식간에 수십 년 세월을 돌려 놓았다폐철로변에서 찍은 사진 한 장마주 손잡은 한 쌍의 표정이 밝고교복 밖으로 새어 나온 일탈이칠십 노인을 즐겁게 한다그리운 건 어찌 푸르른 교복뿐일는지나도 나한테 속았다지난날 교복 안에 갇혀 있던화석처럼 잠자던 욕구가사진 속에 보인다기적 소리 사라진 낡은 기찻길에서늙은 계절에 그려본 봄날의 풍경삐딱해서 티없는 모습철로변 코스

  • 정재황(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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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로망과 노망 사이

아직 피우지 못한 꽃들은한 번쯤은 봄이 되어 주리라 믿었다 그 계절은 지나가고로망은 시간에 닿아 색이 바랬고가슴속의 야망도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름마저 잊은 꿈들이내 어깨 위에서 졸고 있다그들을 깨우기엔 너무 늦은 오후를 맞고 있다 그래도 나는,나의 길을 여전히 걷는다로망과 노망의 그림자 사이를 빛과 바람이 맞닿은 언덕

  • 홍석영(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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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 684호 새내기 오디션(audition)

그즈음말과 글을 잃어버렸다 피폐한텅 빈 공간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바람 한 점으로덩그마니 거기 남아봄 잎새와도 같은 여리디여린 심장을드센 파도에 막무가내 내던져버린 채옴짝 할 수 없는 자투리 한 귀퉁이에서겁쟁이 어린아이처럼 오들거려야 했다창백한 눈동자는 하늘을 불사르고앞과 뒤의 경계가 허물어진 거친 호흡은한 모금의 생수로는 채워지지 않을 목마름이

  • 신흥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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