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대총(伐大聰)이 효종을 울렸다.”요즘 역사 기록을 찾아가 보며, 거란과의 전쟁 드라마도 들여다보며 실록을 맞춤해 본다. 드라마가 허상이라지만 여기저기 골수를 찾아내 즐겁게 이어보는 것도 내 마음의 쾌거다.강화읍 갑곶나루는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나루터다. 조선시대 강화에서 한양(서울)을 오가던 길목이며,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
- 조영자(양평)
“벌대총(伐大聰)이 효종을 울렸다.”요즘 역사 기록을 찾아가 보며, 거란과의 전쟁 드라마도 들여다보며 실록을 맞춤해 본다. 드라마가 허상이라지만 여기저기 골수를 찾아내 즐겁게 이어보는 것도 내 마음의 쾌거다.강화읍 갑곶나루는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나루터다. 조선시대 강화에서 한양(서울)을 오가던 길목이며,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
마을 어귀에 등이 굽은 팽나무가 처연하다. 쩍 갈라진 가슴은 내장까지 타들어 굴 속 같다. 옹두리와 흉터로 뒤덮이고 한쪽 어깨는 뭉텅 잘려 나갔다. 몇 가닥 남은 가지 끝에서는 생의 끈을 놓지 않은 초록 잎새가 생생하다.수백 년 살아오며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 단단히 여몄던 껍질을 벗고 여린 새싹을 밀어 올렸지만, 세상은 따뜻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았다. 느
기다림이란 대체로 진을 빼는 일이다. 오지 않을 사람을 위해 먼 길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일은 참으로 쓸쓸하다. 강물이 흘러가면 그뿐이듯 기다려도 오지 않을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사별이라면 더욱 쓰디쓴 슬픔이다.계절은 가을 문턱을 훌쩍 넘어 제대로 익어 가는 중이다. 단풍의 전령사이기도 한 화살나무잎은 이미 곱게 물들어
붉은 벽돌의 라인을 따라 걷는다. 길바닥에 박아 놓은 붉은 벽돌은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려는 벽돌만큼 단단한 저들의 굳은 의지가 아닌가. 줄을 잇는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미국 독립을 쟁취하고 자유를 지켰던 자부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길바닥의 붉은 라인을 따라 묶어 둔 과거를 훑는다. 미국 독립 역사의 현장인 보스턴에서 자유를 향
묘서동처(猫鼠同處)는 본디 ‘고양이(猫)와 쥐(鼠)가 같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원래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게 자연이 맡긴 역할이고 천적 관계이기 때문에 이들의 오월동주(吳越同舟)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의 부정한 결탁을 방지하고 감시해야 할 존재들까지 한통속이 된다면 세상에서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 인간 세상 또한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만일 우
문을 열자, 고개를 5도가량 기울인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좌반구와 우반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고개를 삐뚤하게 한 채로 잔뜩 찡그리고 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얼굴 근육을 모두 활용하여 표정을 일그러뜨림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아직도 세상으로 나올 준비가 안 되었나 보다. 행여나 호랑이가 동
오늘 서재에서 20년이 된 낡은 종이에 그려진 젊은 날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몇 번의 이사로 방치해 두다시피한 40대 초반 나를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을 보노라니 그리움이 아련히 떠오른다. 20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삶이라는 빠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한 30대의 젊은 청년이 한 장의 종이에 남겼고, 그 붓끝마다 그의
“약만 타서 올 거야! 식사는 갔다 와서 하자. 배고프면 과일 한 조각 먹든지….”남편이 집 근처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면서 한 말이다. 이게 뭐지. 그날은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깊고 단단한 마음이 깃든 듯 들렸다. 사랑은 커다란 고백이나 거창한 선물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기댈 수 있는 믿음과 신뢰가 담겼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
가을빛을 머금은 찬란한 햇살이 창가를 스치며 천천히 강의실을 물들인다. 정돈된 책상과 의자 위로 금빛 빛줄기가 길게 드리워지고, 아직은 텅 빈 공간에는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다. 햇살을 따라 창가를 부유하는 먼지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오후의 이 정적은 곧 시작될 무언가를 기다리는 풍경이다.이윽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침묵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달아오른 그들의 눈빛은 한 곳을 향했다. 다농관 다뤼 회랑으로 향하는 계단 최정상에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이 서 있었다. 조각상 주변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곳곳에서 낯선 이와 부딪치고 동선이 엉켰다. 그러나 그만한 접촉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쳤다. 당당히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진하듯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