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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출구를 찾아라

율희 씨는 매일 꼭두새벽부터 동동거린다. 회사에 출근하는 딸과 초등학교 4학년인 손자, 그리고 자신의 것까지 세 개의 점심을 싸느라 분주하다. 그 바쁜 중에도 샌드위치 하나를 더 만든다. 집에서 종일 빈둥거리면서도 자신의 점심조차 챙겨 먹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서다.사실 샌드위치가 아니라도 밥은 항상 전기밥솥에 있고 반찬도 냉장고에 먹을 만큼 준비되어 있다.

  • 김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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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안네의 집

나는 늘 이국의 어느 도시에서 아침에 홀로 깨어나는 걸 꿈꾸었다. 드디어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에서 아주 은밀하게 생일을 맞이했다.석양이 도버해협을 붉게 물들일 무렵, 나는 호텔 한 채만 한 배를 타고 밤새 도버해의 파도에 실려 아침 일찍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새벽의 창가에서 나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

  • 옹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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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인간 실존(實存)의 총체적 부조리(不條理)로서의 벽 ——사르트르의 소설 「벽」에 관하여

프랑스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단편소설 「벽」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면서, 이 작가에 대하여 소개한 우리 국어사전의 기록을 참고삼아 보기로 하였다. 소위 우리말 사전이란 데에 그 ‘외국’ 작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소 장황한 설명을 붙인 것을 보면 세계 문학계에서의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어림짐작해 볼 수 있게 해

  • 임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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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영철이와 아이들

출입문은 실내화를 갈아 신는 아이들로 복작였다.“청소를 다 한 어린이들은 빨리 교실로 들어가세요!”마이크에서 교감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늦을 새라 조바심치며 재빠르게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혼자 느그적느그적 걸어가던 영철이는 뒤따라가던 아이들을 놓치는 바람에 일층에 있는 교실로 불쑥 들어가 문을 열어젖혔다.“어, 이 형 누구야?”“형,

  • 김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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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할아버지 사진

우리 집의 가장 오래된 앨범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빛이 바래고 모서리가 살짝 구겨진 흑백사진 한 장, 그 사진 속에는 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곧게 세운 어깨에 인자한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8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사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손자

  • 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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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미니멀리즘의 작은 비밀

집은 주인을 닮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 안 곳곳에는 주인의 취향과 지나온 세월이 켜켜이 쌓인다. 아이들이 제 가정을 꾸려 떠난 지도 오래됐지만, 책장에는 여전히 대학교재들이 꽂혀 있고 장롱에는 몇 해째 입지 않은 옷들이 걸려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커튼 사이사이에는 우리 가족의 지난 시간들이 스며 있다.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 버려야 할 옷들을 거실에

  • 김영애(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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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돈 쓸 궁리

뭘 해야 하나. 갈 곳이 없어졌다. 예순 살 정년을 채우고 삼십 년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 정년퇴직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데, 무엇을 시작하지?어느 친구는 한 대학교에 무슨 교수라는 직함을 얻어 강의를 시작했다. 중국어를 들이파고 중국 관련 일을 도맡아 하면서 박사학위까지 받아놓더니 다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술직이었던 동기들도 감리니 고문이니 하

  • 연공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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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물꼬를 보다

검은 구름이 비를 쏟아내자, 멀거니 하늘만 치켜보던 아배가 근심이 낀 얼굴로 깊은 날숨을 토한다. 천둥소리에 감히 밖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시름에 겨워 줄담배만 피워댄다. 평소 같으면 잘도 타들어 가던 연기도 허물하니 맥이 풀린 채 한숨 소리만 크다.비가 잦아드는 기미가 보이자, 아배는 처마 밑에 걸어둔 비옷을 걸치고 삽 한 자루를 들고 집을 나선다. 비는

  • 김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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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내 동무

생각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의 동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람결에 첫남편과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었다. 꿈 많던 시절, 그 아이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작은 결혼 선물 하나를 건네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자의 세월 속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거의 삼십 년이 흘렀다.“어머, 복순아. 어쩐 일이야? 어떻게 전화할 생각을 했어? 전화번호는 어

  • 이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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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내 마음의 강물

‘그날 그때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한동안 다독였다 싶던 지난 일들이 피아노 전주에 맞춰 가슴을 파고든다. 폐부 깊숙이 들이켠 숨을 선율로 자아내는 오카리나, 취구를 살짝 덮은 입술이 전에 없이 떨려온다. 감 정에 휘둘려 자칫 가락이 흐드러질세라 악기를 감싼 손끝에 힘을 가한다.뚫어질 듯 악보를 응시하나 초점이 자꾸만 흔들린

  • 김정숙(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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