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아온 돌오래 가까이 두고 보니친구가 되어산을 강을 바다를 이야기 한다 함께하던 친구들 다 떠난 뒤에 더욱 애틋하다돌이 나의 자화상이라 해도 좋다 내가 지쳐 일어날 힘이 없을 때 그는 묵언으로 다가와 위안한다 돌은 온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너는 내 혈연 같다고 나는 말한다 많은 친구들이
- 엄한정
내가 찾아온 돌오래 가까이 두고 보니친구가 되어산을 강을 바다를 이야기 한다 함께하던 친구들 다 떠난 뒤에 더욱 애틋하다돌이 나의 자화상이라 해도 좋다 내가 지쳐 일어날 힘이 없을 때 그는 묵언으로 다가와 위안한다 돌은 온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너는 내 혈연 같다고 나는 말한다 많은 친구들이
푸른별에게 젖을 물리는 순이의 꼬리가 바짝 섰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젖을 잘 빨 수 있도록 앞발도 벌렸다. 어미 옆에 찰싹 붙어 헉헉거리며 젖을 빠는 푸른별을 보며 눈을 뗄 수 없다. 골짜기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어둠을 가르며 하늘에 번지는 붉은 기운을 받아 순이와 푸른별의 하얀 털이 핑크빛으로 반짝인다. 우리 너머 밭고랑 끝자락에 있는 주인
얼굴이나 뵈려고 잠깐 누님 댁에 들렀더니, 누님은 보이지 않고 그 녀석이 한쪽 손에 책을 펴든 채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마루 밑에서 졸고 있던 누렁이가 인기척에 힐끗 쳐다보더니 무작정 짖어 대기 시작한다. 오다가다 제게 뼈다귀 던져 준 것만 해도 한 트럭은 족히 될 텐데, 아직도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를 보고 으르렁거린다.누렁이 소리에 책에서
“나지선 님, 들어오세요!”6번 진료실 간호사가 호명했다. 나는 나지선 이름에 눈을 번쩍 떴다. 내 옆 옆자리 여자가 검정 패딩을 벗어 앉았던 자리에 던지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지선, 나지선? 어딘가 아는 이름인데 누구 이름일까? 폰에서 윤희영을 눌렀다.“참 부지런도 하셔. 아침부터 웬일?”“너, 나지선 이름 알지?”“뚱딴지같이 나지선은 왜 누군데?”“우
교감 은실은 모두가 퇴근한 교무실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업무 경감 차원으로 교육청에서 불필요한 문서를 사양하겠다고 발표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공문은 아직 줄어들 기미가 없다. 답답하다고 투덜거리며 필요한 서류들을 찾고 있다. 장시간 모니터를 주시한 탓인지 근래 들어 시리고 아픈 눈으로 서류들을 뒤져서 겨우 ‘의원면직
첫눈썰미로는 이불로 보였다. 하늘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봄이불이 쫙 펼쳐져 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갔다. 좁쌀, 녹두 크기나 될까, 콩보다 작아 귀엽고 앙증맞은 하늘색 얼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양지바른 곳 무리지어 있어 외롭지 않아서일까. 순한 표정이 밝고 환하다. 아파트 뒷산 평평한 풀밭에 넓게 자리 잡은 풀꽃, 다정한 친구처럼 말
음악과 시절은 가끔 함께 간다.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살았던 그 시절이 떠오르고, 그렇게 과거를 돌이켜보면 아련한 기억처럼 음악이 다시 떠오르는 그런 순환이라고나 할까. 이럴 때면 내 삶의 어느 순간을 음악이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말랑해지곤 한다. 음악이 머무는 시간에는 아마도 한때의 온갖 감정이 부유하고 있을 테
올해 여름은 무난히도 덥고 길었다. 열대야에 시달리던 뜨거움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풍경이 짙은 노랑, 빨강, 따뜻한 오렌지 등 김해의 산과 들은 가을 색조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가을은 추억, 향수, 설렘 같은 단어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익숙했던 풍경은 낯설어지고 찬란하면서 쓸쓸한 기분이 동시에 느껴지는 가을은 나를 시인으로 만든다.시적 감성을 느
5월의 끝자락,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이지만 요즘 날씨는 참 변덕스럽다. 낮에는 초여름의 햇살이 이글거리고, 밤에는 서늘한 공기가 두꺼운 이불을 부른다. 계절조차 혼란스러운 요즘, 사람들의 일상도, 우리의 하루도 언제든 흔들릴 준비가 된 듯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인천 부평구의 여러 재난 현장에 24시간 동안 긴급 출동해 대응 활동을 진두지휘하는
“엄마! 괜찮아요?”신음에 가까운 딸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어떤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입술만 달싹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잠시 후, 아득한 정신으로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떠보니 딸은 조수석 문짝에 웅크리고 있었고, 나는 안전띠에 묶인 채 공중부양하듯 왼쪽 어깨가 자동차 천장을 향해 있었다. 서로 다친 데는 없냐며 여기저기 살피는데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