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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올챙이

넓게 펼쳐진 녹색 잔디 위에 천천히 선을 긋는다. 어떤 선은 짧고, 어떤 선은 길게 이어지며 수없이 많은 선이 잔디 위를 스쳐 간다. 그 선들은 단순한 표시 같지만, 그 위에는 잠시 멈추어 서는 마음과 다음을 준비하는 숨결이 함께 얹힌다. 잠시 시선을 낮추고 공을 바라본다. 힘을 빼고 조심스럽게 스틱으로 공을 치는 순간,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진

  • 이명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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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갯벌, 시간을 품다

바다 위 데크를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썰물 때라 훤히 드러난 바닥에서 갈매기 떼들이 먹이를 찾는다. 오래전 기억 속에 저장된 서랍을 열어 예쁜 추억을 함께한다.지난봄, 한적한 시골에 사는 조숙희 갯벌 화가를 만났다. K문우가 한 아름 꽃다발로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나는 고향 까마귀를 만나서인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녀의 남

  • 노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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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우리들의 마지막 비상구

누워서 먹는 밥은 눈물부터 먼저 흐른다. 안간힘을 다해 몸을 모로 살짝 틀었다. 국물 담은 숟가락의 평형을 맞추는 일이 이리 힘들 줄이야. 마지못하여 마른 밥만 몇 숟가락을 삼켰다. 교대한 간병인이 수저를 씻어 물기를 툭툭 털어 서랍에 넣으며 물었다.“젊은 사람이 어쩌다가….”나는 몇 번이고 머뭇머뭇하다 입을 열었다.“저, 기저귀 좀 갈아….”이윽고 간병인

  • 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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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황혼을 호수에 내려놓으며

생각을 했어야 했다. 나를 살폈어야 했다. 지금의 삶에 부족함이 있는가.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직도 꿈꾸는 미래가 있는가. 넉넉한 경제력은? 계속 건강하리란 보장은?BTS 지민이를 보며 아침을 열고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가 엉덩이를 요리조리 씰룩대면 종종종 따라가며 안아보고 싶어 안달하는 내 어린증(症)을 떠올렸어야 했다. 아직도 열세 살 별명을 떨

  • 김종숙(佳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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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차경(借景)의 미학

산속에 정원이 있다고 했다. 평평한 야산도 아니고 산세가 가파른 산 중턱에 정원이 있다니 의아했다. 정원을 만드느라 수고가 많았을 것 같다.정원은 남한산성 중턱에 있다고 했다. 정원을 품고 있는 정자를 찾아야 정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남한산성 행궁을 지나서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점가교(漸佳橋)라는 돌다리를 건너야 뒷산으로 올라가는데

  • 조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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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다시 꾸는 꿈’을 또다시 펼쳐보며

누가 나에게 맨 처음 읽은 문학작품을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아버지의 편지글이라 대답할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장롱 속 빨간 나무 상자에 모아 두었던 편지 다발을 발견해 읽기 시작했고, 다 읽었을 즈음엔 방 안이 온통 발그레 물든 듯했다. 아기 둘을 두고 군에 간 군인 아빠 시절 아내에게 보냈던 아버지의 편지를 넋 놓고 다 읽었던 것이다.두세 살 된

  • 이향희(고양)수필가·경기도 고양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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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머리를 기르려 합니다

머리를 기르려 합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긴 머리를 가지고자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긴 머리를 못 해 볼까 봐, 남은 세월 동안 다시는 긴 머리를 가져 보지 못할까 봐 내 생애 마지막으로 머리를 기르려 한다는 선포부터 하고 머리를 기르려 합니다.우스운가요? 그깟 머리를 자르고 기르고자 하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로운 선택이냐고 말씀하시렵니까? 그러나 그

  • 하명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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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 693호 위가네 삼겹살

삼겹살이 익을 무렵항상 늦는 코리안타임 여인이 왔다기구한 여인이 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왔다 저 말하기 전에 먼저 울게요미리 운을 띄우고 연신 우는 여인울지 마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한 여인은 울고한 여인은 울음을 듣고나는 삼겹살을 뒤집었다슬픔에 슬픔을 부어 마시는 소주아픔에 아픔을 얹어 먹는 삼겹살빈 술병이 늘어도아이를 먼저 보낸 어미의 슬픔은

  • 이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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