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게 펼쳐진 녹색 잔디 위에 천천히 선을 긋는다. 어떤 선은 짧고, 어떤 선은 길게 이어지며 수없이 많은 선이 잔디 위를 스쳐 간다. 그 선들은 단순한 표시 같지만, 그 위에는 잠시 멈추어 서는 마음과 다음을 준비하는 숨결이 함께 얹힌다. 잠시 시선을 낮추고 공을 바라본다. 힘을 빼고 조심스럽게 스틱으로 공을 치는 순간,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진
- 이명순(서울)
넓게 펼쳐진 녹색 잔디 위에 천천히 선을 긋는다. 어떤 선은 짧고, 어떤 선은 길게 이어지며 수없이 많은 선이 잔디 위를 스쳐 간다. 그 선들은 단순한 표시 같지만, 그 위에는 잠시 멈추어 서는 마음과 다음을 준비하는 숨결이 함께 얹힌다. 잠시 시선을 낮추고 공을 바라본다. 힘을 빼고 조심스럽게 스틱으로 공을 치는 순간,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진
바다 위 데크를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썰물 때라 훤히 드러난 바닥에서 갈매기 떼들이 먹이를 찾는다. 오래전 기억 속에 저장된 서랍을 열어 예쁜 추억을 함께한다.지난봄, 한적한 시골에 사는 조숙희 갯벌 화가를 만났다. K문우가 한 아름 꽃다발로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나는 고향 까마귀를 만나서인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녀의 남
누워서 먹는 밥은 눈물부터 먼저 흐른다. 안간힘을 다해 몸을 모로 살짝 틀었다. 국물 담은 숟가락의 평형을 맞추는 일이 이리 힘들 줄이야. 마지못하여 마른 밥만 몇 숟가락을 삼켰다. 교대한 간병인이 수저를 씻어 물기를 툭툭 털어 서랍에 넣으며 물었다.“젊은 사람이 어쩌다가….”나는 몇 번이고 머뭇머뭇하다 입을 열었다.“저, 기저귀 좀 갈아….”이윽고 간병인
생각을 했어야 했다. 나를 살폈어야 했다. 지금의 삶에 부족함이 있는가.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직도 꿈꾸는 미래가 있는가. 넉넉한 경제력은? 계속 건강하리란 보장은?BTS 지민이를 보며 아침을 열고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가 엉덩이를 요리조리 씰룩대면 종종종 따라가며 안아보고 싶어 안달하는 내 어린증(症)을 떠올렸어야 했다. 아직도 열세 살 별명을 떨
산속에 정원이 있다고 했다. 평평한 야산도 아니고 산세가 가파른 산 중턱에 정원이 있다니 의아했다. 정원을 만드느라 수고가 많았을 것 같다.정원은 남한산성 중턱에 있다고 했다. 정원을 품고 있는 정자를 찾아야 정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남한산성 행궁을 지나서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점가교(漸佳橋)라는 돌다리를 건너야 뒷산으로 올라가는데
누가 나에게 맨 처음 읽은 문학작품을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아버지의 편지글이라 대답할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장롱 속 빨간 나무 상자에 모아 두었던 편지 다발을 발견해 읽기 시작했고, 다 읽었을 즈음엔 방 안이 온통 발그레 물든 듯했다. 아기 둘을 두고 군에 간 군인 아빠 시절 아내에게 보냈던 아버지의 편지를 넋 놓고 다 읽었던 것이다.두세 살 된
머리를 기르려 합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긴 머리를 가지고자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긴 머리를 못 해 볼까 봐, 남은 세월 동안 다시는 긴 머리를 가져 보지 못할까 봐 내 생애 마지막으로 머리를 기르려 한다는 선포부터 하고 머리를 기르려 합니다.우스운가요? 그깟 머리를 자르고 기르고자 하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로운 선택이냐고 말씀하시렵니까? 그러나 그
고무신 거꾸로 신어 잠 못 드는 철조망아 “인천의 성냥공장♪” 한목 뽑던 명가수야 ‘파티’란 한따까리지 순진했던 야밤이다 가죽 향 새 군화는 눈웃음이 바꿔 가고 지구를 안고 구르던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알철모 거꾸로 박아 한강철교를 세웠다 철쭉꽃 진달래꽃 오지랖 넓은 열두 개울 인생의 군번줄
삼겹살이 익을 무렵항상 늦는 코리안타임 여인이 왔다기구한 여인이 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왔다 저 말하기 전에 먼저 울게요미리 운을 띄우고 연신 우는 여인울지 마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한 여인은 울고한 여인은 울음을 듣고나는 삼겹살을 뒤집었다슬픔에 슬픔을 부어 마시는 소주아픔에 아픔을 얹어 먹는 삼겹살빈 술병이 늘어도아이를 먼저 보낸 어미의 슬픔은
탁자에 올린다몸통을 잃은 껍질이찬 기운을 빈 몸 가득 채우고 퍼져 눕는다 몸이 몸이 아닐 때죽음일까껍질은 아직도 노란 빛깔을 자랑하며 싱싱한 언어를 발산 중인데 늙음은 시간이 불러주는 별명싱싱한 껍질은 아직 이름을 원치 않는다 속을 만들고 살찌운 당당한 지난 날을 속속이 켜켜이 물고비었으나가득한 입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