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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S -당권투쟁과 국보법, 한미동맹

한국 시민이 두 번 탄핵했다.

박근혜, 윤석열.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비, 추위를 무릎 쓰고 원한 것은 무엇인가.

주권이었다.

민주주의, 자신들이 주인인 나라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두 가지를 외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이다.

국보법은 악법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국보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국보법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조약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반미 =종북’이라는 소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정권에 대해

두 번 탄핵한 용기가 있는 시민들은

이재명 정부가 집권한 뒤

4.19 혁명, 87년 6월 혁명,

2017년 촛불혁명 이후 그랬던 것처럼

현실 정치는 기존 정당이 도맡아서 하면서

구경꾼으로 전락했던 모습을 반복했다.

혁명의 주체이면서 국민들이 강제 퇴거시킨

정치권력의 빈자리는 기존 정당들 몫이 되었던

관행이 또 다시 반복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거리에서 투쟁해

윤석열 탄핵을 성사시킨

빛의 혁명 주역 어느 누구도

장차관을 시키지 않았고

시민들은 잘 하겠거니

박수치고 지켜보는 역할을 하는

과거를 되풀이 했다.

그런데 괴이했다.

내란이 분명한데, 국내외에서

TV로 내란 현장이 생중계되었는데

불법계엄이 불가피했다느니

윤 어게인이라고 외치는

거대 야당 국회의원 등의

목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현행 정당법, 선거법, 정당지원법 등이

거대 2개 정당의 존립을 보장해주면서

회전문식으로 정권교체를 하는 일이

반복되게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거대 여당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거대 야당의 집권이 가능한 구조가

국민을 개돼지로 만드는

정치공학만이 난무하게 만들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유튜브 방송을 앞 다퉈 찾아가고

법사, 도사와 함께 여론조작 전문가,

선동선전 모리배가 현실정치와

공생공사를 거듭하는 기현상이 지속된다.

거대 여야당의 관심은 오직 권력 장악 뿐

선거에서 득표에 도움 되는

작은 일만 챙기고

국민이 주권자를 위한 큰 정치를 외면한 채

두 대통령을 탄핵케 만든 정치구조 속에서

계속 다투고 헐뜯는 일이 반복되면서

총성 없는 추한 전쟁만이 악취를 풍긴다.

그러면서 이재명 정부 집권

1년이 지난 2026년 6월

지방선거가 끝나자 거대 여야당은

일제히 당권경쟁, 당내 권력투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민생과는 관련이 없는

정당과 진영 내부의 우물 안

개구리 싸움과 흡사했다.

대통령도 나서서 한 몫을 하는

치열한 집안싸움이 가열되면서

이재명 정부조차 국민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는 정권교체가

재집권보다 더 높게 나오고

거대 야당 일각에서는 다음 총선과

대선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외친다.

내란 동조 당으로 낙인찍힌

거대 야당이 기사회생의

기회가 왔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여의도 정치판은 당권 쟁탈전의

진흙탕 싸움으로 날밤을 샌다.

왜 저럴까?

여권의 증축, 재건축, 재개발 논란이나

‘문조털래유', '수박’ 시비 때문인가.

야권의 윤어게인과 반대파의

당 주도권을 다투는 힘겨루기 때문인가?

밖에서 보면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집안싸움,

도토리 키 재기 식의 권력 다툼인데

우물 안 개구리들은 생사를 건

대회전인 양 온통 난리 법석이다.

두 대통령이 탄핵당한 사회구조가 유지되면서

구역질나는 여의도의 패거리 정치가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은

또 다른 대통령 탄핵을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 무관심하고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정치를 아무도 개혁하려 하지 않는다.

보라, 거듭된 혁명 속에서 현실정치는

지난 수십년간 반복된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 정당만이 배 터지는 특권을 누리는

선거법, 정당법, 정당지원법이 여전하고

헌법기관 국회의원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당대표 관행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민주권 정부를 앞세우면서도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보법에 침묵하고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는

비민주적 공간속에서 과거 정부와 흡사한

정상배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정치권이 국민의 헌법적 기본권을

원천 봉쇄하는

국보법과 불평등 한미동맹에 침묵하면서

70 여 년간 겹겹이 쌓인 비민주적 구조의

모순이 화급히 폭발 점으로 치닫고 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이 나라 국민은 지난 70 여 년 동안

헌법적 주권자의 권리가 봉쇄된

두 개의 감옥에 갇혀있다.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이라는

두 감옥 안에서 5천만 명이 살고

언론이 쓰고 정치인이 말하고

학자가 연구한다.

두 감옥의 벽을 넘으면

종북, 반미가 되거나

빨갱이가 된다.

두 감옥에서 탈피할 열쇠가 무엇인가.

첫 번째 열쇠는 국가보안법 개폐,

혹은 최소한 제7조 개정이다.

두 번째 열쇠는 한미상호방위조약 6조 발동으로

대등한 주권국가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정치권, 언론과 학계는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두 열쇠를 외면하고 침묵한다.

그것을 말하고 사용하면 후폭풍이 온다는

계산과 공포에 짓눌린 탓이다.

국민이 두 개의 감옥에 갇혀

좁아진 민주주의 공간에서

신음하는데도 거짓말을 한다.

“이 나라 국민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어 불편하지 않다.

국보법은 북한 때문에 필요하고

한미동맹도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미래에도 역시 북한 때문에 불가피하다.

국민은 두 감옥에서 지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럴까? 그것이 진실일까?

그렇다면 따져보자.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를 얽어매는 그 법

북녘 동포 전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며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의 소통마저 차단하는

반인륜적 악법, 그것이 국보법이다.

산천이 일곱 번이나 변할 시간이 흘렀건만

이 법은 여전히 한반도의 공기처럼 존재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독가스로

정보강국 코리아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는다.

"반미는 친북이다"라는 단순무식한 공식

그 속에서 북한은 오직 절대적 악(惡)일 뿐

미국의 그늘은 항상 정의로운 편이 되라며

정치권은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고 있다.

언론은 국보법이라는 칼날 아래서

스스로의 혀를 깨무는 자기검열에 능숙하다.

북한 보도할 때면 정해진 공식에 따라

도발, 위협, 비난이라는 프레임 기사를 반복한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무비판적, 긍정 일색으로 보도하지만

북한의 입장이나 구조적 원인은 철저히 배제한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에 역행하는 이 검열은

진실을 왜곡하고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있다.

만약 국보법이 사라진다면

언론이 360도 전 방위를 짚어보는 기사를 쓴다면

북한 핵문제, 미국 핵우산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해법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창조적 결론이 모아질 텐데

지난 70 여 년간 언론은 외면하고 정치권은 침묵한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찬양·고무·동조에 관한 것으로

머릿속 상상, 사상을 처벌하는 장치다.

북한을 이롭게 하는 표현,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북한 주민의 인간적 측면을 말하는 것 등등등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

친미와 반미 사이에 수많은 대안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분법의 늪에 갇혀 헤매고 있다.

군사 주권을 되찾는 일이 반미가 아니라

진정한 국익을 위한 성숙한 외교의 시작이다.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제7조를 지적했다.

“폐지하거나 개정하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말했다.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다.”

수십 년째 반복된 권고.

한국 정부는 수십 년째 외면했다.

그 조항이 하는 일을 보라.

북한 핵을 분석할 때

미국의 대북정책의 역할도 함께 봐야 한다.

그러나 그 분석을 하다가

자칫 친북으로 몰릴 수 있다.

정치와 언론은 안전한 방향만 말한다.

북한은 악이고 미국은 정의라고.

자기검열이 전 국민에게 일상화 되고 있다.

그것이 국보법의 진짜 권능이다.

철창 없는 감옥의 기술이다.

국보법에 의해 남한 정치, 언론이 만든

기이한 방정식이 있다.

미국 비판 = 반미, 반미 = 친북,

친북 = 이적행위, 이적행위 = 국보법 적용.

그러므로 미국을 비판하면 국보법에 걸릴 수 있다.

이 방정식이 맞는지 검증해 보자.

미국이 한국 정부를 도감청하고

윤석열 정부가 문제없다고 했다.

용산 미군기지가 기준치 36배로 오염됐지만

한국 정부가 15cm 흙을 덮고

공원으로 만들어 어린이, 일반시민에게 개방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불용액 2조 원이 미국 은행에 있는데

그 돈을 낸 한국 정부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반미라서 그런가

한국 사회가 조용하다.

반미이면 친북이고 친북이면 국보법인가.

이 방정식이 진실인가, 아니면 지배의 도구인가.

국보법이 지배하는 남한에서

매일 뉴스가 나온다.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

도발이며 위협이다.

미국이 전략핵폭격기를 보냈다.

대북 억제력이고 안보 강화다.

그 뉴스를 매일 보는 국민이 생각을 굳힌다.

북한은 절대 악.

미국은 절대 선.

한미동맹은 신성불가침.

이의를 제기하면 종북.

이것이 확증편향이다.

매일, 365일, 70년 넘게 반복된 확증편향.

그 편향 속에서 평화를 고민하고

남북이 공존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공간이,

한미동맹의 문제점을 말하는 공간이 사라진다.

그 공간이 없으면

대안이 나올 수 없다.

대안이 없으면

전쟁 아니면 현상유지뿐이다.

남한의 언론사 기자가 기사를 쓴다.

북한 핵을 다루는 기사인데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판적으로 써야 하나.

그러면 반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반미 소리를 들으면 친북으로 몰리고

국보법으로 처벌될 수 있다.

그래서 기자는 안전한 방향을 선택한다.

북한은 악이고 항상 도발한다고.

미국은 언제나 옳고 정의롭고

한미동맹은 필수라고 기사에 쓴다.

이것이 자기검열이다.

강제가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한다.

국보법의 진짜 무기는 그것이다.

처벌하지 않아도 된다.

두려움만으로 충분하다.

두려움이 언론을 가둔다.

언론이 국민을 가둔다.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만든다.

세계 10위 경제강국, 세계 6위 군사력,

K팝이 세계를 누비는 나라의 언론이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 1년을 넘기고 시작된

심각한 여권 내분상황에서 개혁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국보법에 대한 과거사로 정적을 공격했다.

이 대통령은 2026년 9월 25일 저녁

멕시코시티 시내의 한 호텔에서 개최한 동포간담회에서

민주당 일각에서 선명성 드러내려 과한 주장을 하고 있다며

국보법 독소조항 폐지가 물 건너갔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당시

'국가보안법을 없애자, 통째로 폐지하는 건 무리니까

독소조항 몇 개라도 삭제하자고 여야가 거의 합의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갑자기

'폐지를 해야지 반만 폐지하는 게

세상에 어딨냐'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국가보안법 통째 폐지는 안 된다'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도 그 법 조항이 살아 있어서

누군가가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는 당시

유시민씨 등이 국보법 완전폐지를 주장했던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친명 송영길 민주당 의원도 최근

유튜브 방송에서

"(국보법) 7조를 삭제하는 절충안을 야당과 합의해

의총에 가져 왔더니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반대한 사람이

유시민 의원이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며

"자신들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과한 주장을 한다"며,

검찰개혁과 관련해 자신이 '국민을 속였다'고 비난한

유씨 등 강경파를 정조준했다.

현직 대통령이

21세기 최대 악법 중 하나인 국보법 개폐 논란 과정에서

이른바 강남좌파 진보진영의

강경 주장으로 글자 하나 못 고친

현실을 비판적으로 거론한 것은 처음이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빛의 혁명의 요구와

여당이 다수당인 현재 의회 상황을 고려해

국보법 개폐를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할지 여부는 확실치 않아 아쉽기 짝이 없다.

2018년 3 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장문의 합의가 나왔다.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 중단하고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며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하자.

평화통일의 꽃이 피는 것 같았지만

트럼프가 제동을 걸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데

남북화해가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다.

비핵화 진전 없이 남북교류 없다.

그것이 미국의 답이었다.

유엔사가 군사분계선 통과를 막았다.

유엔사는 미국의 정부기구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에 공식적 항의 없이 임기를 마쳤고

언론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같이 침묵,

북한은 극도의 불신과 적대감을 보이면서

두 국가론의 적대적 대치를 부르는

비극의 서곡이 되었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주한미군은

북한 방어를 위해 필수라는데

미국에게 주한미군은 미 본토 수호를 위해

중국, 소련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최전방부대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미 대통령은 동북아에서 방어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방어조약 등을 묶어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를 만들어

70 여 년째 가동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핵보유 강대국 두 나라가 포진한

대륙을 향해 1950년대 말부터

핵무기를 다량 한국에 배치했는데

겉으로는 이들 핵무기가 대북용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러시아와 중국이 핵보유국이어서

주한미군의 핵무기 목표가 어딘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미국은 가짜뉴스로

세계를 속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의 이런 작전에 대해 미국은

미국법에 의해 비밀로 분류하고

한국 정부도 입을 다물도록 SOFA 규정을 만들었다.

한국정부는 70 여 년 동안 한미동맹을 이유로

주한미군의 대륙을 향한

작전을 국민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국회도 침묵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국민에 대한 헌법적 책무를 방기한

직무유기라 할 수 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해치는 요인으로, 이재명 정부도 마찬가지 태도다.

동시에 강대국간 전쟁 가능성에

국민을 방치한 심각한 문제도 한국 정치는 모르쇠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비밀리에 수행하던 중러작전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고

이는 국제법적으로 한국이 만약의 불상사에

책임을 저야 하는 문제가 있다.

중러가 합동군사훈련을 한반도 주변에서 강화하고

주한미군과 중국공군기가

서해상에서 대치한 것 등에 대해

정부는 국민에게 설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책무가 있다.

주한미군과 유엔사가 한일 두 나라를

군사적으로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심각하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가동하는데

필수적 요인으로 보고 한반도를 관리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거나, 평화통일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

적절한 군사적 긴장상태가 유지되도록

남북한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남한에 대해서는

군비증강을 추동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5024, 5027, 참수작전 등과 같은

대북작전계획을 지속적으로 공개해 북한을 자극했다.

그 결과 2026년 6월 현재 남북한은

서로 핵으로 상대를 전멸시키겠다는

수준의 대치상태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도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사령관 모자 3개를 쓰고

남한에서 한미군사관계를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는

세계 주둔군 역사에서 초유의 일이다.

미국식 합리주의가 주한미군의 지속 주둔을

보장할 최장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만든 치밀한 조치다.

이뿐 아니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마치 점령군같은

권한으로 주둔하게 만든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주한미군은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면서

그 기지 시설은 한국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의해 가능하다.

이 4조는 주한미군에게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미국은 미군사력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한국은 허여하고 미국은 수용한다."

권리?

이 단어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미국이 원하면 핵무기, 사드가 들어온다.

미국이 원하면 탄저균 실험실이 들어온다.

미국이 원하면 무인폭격기가 들어온다.

한국이 미국의 권리를 허여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은 대북 선제타격, 참수작전을

한국과 사전 협의 의무가 없다.

미국이 북한을 때리기로 결정하면.

서울이 불타는 동안.

한국은 통보를 기다릴 뿐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2조는 말한다.

‘위협 판단을 미국이 단독으로 한다.

무력 강화 수단도 미국이 단독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동맹인가, 아니면 예속인가.

한미군사관계가 어떤 수준인지는

미국이 필리핀, 일본, 나토 회원국 등과 맺은

군사관계에서 확인된다.

필리핀은 1992년 의회가 결정했다.

클라크 미군기지 연장 불허, 미국이 나가라.

핵무기는 들여오지 마라.

미군이 지은 시설은 우리 것이다.

우리 법을 따라라.

미군은 필리핀에 주둔하지 못하고

방문군 형식으로만 들어와라.

한국과는 너무 다르다.

미국이 군사력을 배치하는 것은 권리이고

한국 법을 존중하되 따르지 않아도 된다.

미군 시설을 한국이 짓고 준다.

방위비까지 우리가 낸다.

같은 미국과의 동맹.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필리핀은 주권을 행사하지만

한국은 국보법과 친미라는 틀 안에 갇혀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6조을 보자.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한 당사국이 상대 당사국에게

미리 폐기 통고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식시킬 수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조약을 폐기하거나

개정 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조약을 수정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에

수정을 하려면 이 조항을 발동해야 한다.

"우리는 이 조약을 종식하겠다."

이 말을 누가 할 수 있는가.

국보법이 두렵고 친미라는 틀에 갇혀서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도 그 말을 잊고 산다.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도 문제가 심각하다.

현재 전쟁이 나면 한국군을 누가 지휘하는가.

미군 사령관이다.

그 미군 사령관은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익을 위해 결정한다.

그 사령관이 한국군 60만을 지휘한다.

한미는 전작권을 2012년에 환수하기로 했다가

2015년으로 미루고 2014년에 다시 무기한 연기했다.

조건을 만들었다.

한국군 능력을 미군이 테스트해서 합격해야 한다.

세계 6위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자국 군대의 지휘권을 되찾으려면.

외국 군대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인가.

독일과 일본은 어떻게 하는가.

독일은 자국군을 자국이 지휘한다.

나토와 협력하되 지휘 계통은 분리된다.

미국에 항복했던 일본은 자위대를 스스로 지휘한다.

미군과 협력하되 복속되지 않는다.

한국만 다르다.

한국만 전쟁이 나면.

한국 대통령이 한국군을 지휘하지 못한다.

이것이 혈맹인가.

이것이 동맹인가.

이것이 예속이 아닌가.

다시 물어보자.

국보법과 한미동맹 감옥 안에 있으면 안전한가.

감옥 안에 있으면 전쟁이 오지 않는가.

감옥 안에 있으면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가.

아니다.

감옥 안에서

핵 위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감옥 안에서

남북이 서로에게 멸절을 선언하고 있다.

감옥 안에서

1000만 이산가족이 죽어가고 있다.

감옥의 문을 여는 것.

그것이 무서운 일인가.

아니면 감옥 안에서 핵전쟁을 기다리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인가.

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평화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온다.

두 감옥의 문을 여는 용기.

그것이 평화의 시작이다.

이제는 침묵을 깨고

주권의 광장으로 매진할 시간,

동맹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똑바로 세워야 한다.

친미와 반미라는 흑백 논리를 걷어치우고

건강한 공론화로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6조를 미국에 통고하자.

"미리 폐기 통고한 후 1년 뒤 종식할 수 있다"

주권의 깃발을 하늘 높이 들어,

불평등한 예속의 어둠을 걷어내고

미국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자.

남북이 공존하고 평화통일로 가는

로드맵을 다시금 굳건히 세우고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아가자.

이 땅의 후손들에게 전쟁의 공포가 없는,

진리와 정의가 넘쳐나는

풍요롭고 빛나는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당당히 물려주자!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505 2026.07.02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9-불의 비, 핵과 세균전 그림자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개시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자,

중국은 1950년 10월 19일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 20여만 명을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투입해 전쟁에 본격 개입했다.

중공군은 10월 25일 1차 공세를 개시하며

유엔군 후방을 위협했고,

기만전술로 유엔군을 유인한 뒤 자취를 감췄다.

맥아더 사령관이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과소평가한 채 '크리스마스 공세'를 명령하자,

중공군은 11월 25일 2차 대공세를 펼쳤다.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부터

장진호 전투가 벌어져,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 7개 사단의 포위 속에서

2주간 혹독한 추위 속에 격전을 벌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으나,

유엔군은 동부전선에서 대대적인 후퇴를 피할 수 없었다.

중공군의 공세로 전황이 급변하자,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38선 이남으로 대규모 철수를 단행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유엔군은 곧바로 반격에 나서

1951년 3월 서울을 재수복했다.

이후 양측은 38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진격과 후퇴를 반복했다.

결국 1951년 6월경부터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전쟁은 기동전에서 참호전과

고지전 중심의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한민족 최대의 비극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연을 낳았다.

숫자가 있다.

63만 5천 톤.

그것이 1950년 6월부터 3년 동안

압록강에서 낙동강까지

미 공군의 B-29가 뿌린 불의 기록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의 무게다.

이 숫자는

2차 대전 때 일본에 퍼부은 16만 톤의

거의 4배였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에 떨어진 것은

106만 톤.

일본에 떨어진 것은 50만 톤.

그러나 유럽은 6500만 명의 땅이었고

일본은 7200만 명의 땅이었다.

북한은 970만 명의 땅이었다.

숫자를 나누면

진실이 드러난다.

한 명이 감당한 폭탄의 무게

한반도가 세계 어느 전쟁보다

무거웠다.

북한의 22개 도시는

60%에서 95%까지 사라졌다.

한 종군기자가 적었다.

“압록강과 평양 사이는 철저히 파괴되어

도회지는 보이지 않았다.

빨래판처럼 판판했다.

사람이 살았던 곳은 굴뚝만 남아 있어

마치 달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

도시와 마을의 밤은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불탔고,

평양, 강계와 신의주와

이름 없는 마을들까지

불길은 경계를 모르고 번졌다.

네이팜은 살을 삼켰고

소이탄은 집과 기억과 숨결을 함께 태웠다.

네이팜은 단순한 폭탄이 아니다.

강력한 폭약으로 먼저 건물을 부순다.

그 다음 네이팜이 불을 붙인다.

소이탄이 그 불을 살린다.

단 20분 만에

도시 전체가 1500도에서 2000도의

화재폭풍에 휩싸인다.

연기가 산소를 빼앗는다.

생명체는 타거나 질식한다.

사람들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으며

얼어붙은 겨울 강 위에

붉은 화염이 떠다녔다.

1950년대 북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

이 방법이 비도덕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미국도 인정했다.

그래서 정밀폭격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자

그 원칙은 폐기됐다.

1950년 11월 5일 B-29 폭격기 22대가

강계로 날아가 75%를 파괴했다.

단 하루에.

맥아더가 지시한 작전이었다.

강계, 신의주, 그리고 수 개의 작은 도회지를

화염 공격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북한의 모든 도시와 부락.

공장.

건물.

통신 시설.

모두 파괴하라.

전쟁이 끝났을 때

미 공군이 스스로 평가했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목표물 파괴율 85%.”

그러나 그 ‘목표물’ 속에는

할머니, 젖먹이를 안은 어머니가 있었다.

북한의 인구는 당시 970만 명.

그중 99만 5천 명이 죽었다.

최대 150만 명이라는 추정도 있다.

비교해보라.

2차 대전, 독일의 민간인 사망자는 40~60만 명.

일본의 민간인 사망자는 33~90만 명.

한반도는 더 작았지만

더 많은 죽음을 삼켰다.

전쟁의 이름 아래 도시는 불타고

강물은 시체를 떠내려 보냈으며

밤하늘은 끝없는 화장터가 되었다.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되자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미군 폭격기들이 댐을 공격했다.

독산, 자산댐, 구원가, 남시댐.

물이 터져 농지가 잠기고 작물이 사라졌다.

수백만 명이 굶주렸다.

협상 카드였다.

주민들의 굶주림이

협상 테이블 위의 카드였다.

폭격이 계속되어

마침내 목표물이 사라졌을 때

미군 폭격기들은

개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폭격했다.

아니면 그냥 바다에 폭탄을 버렸다.

할당량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2026년 트럼프가

이란의 비군사시설을 파괴하며

지옥문이 열릴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1950년대와 닮았다.

중국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맥아더가 요구했다.

“만주와 압록강 주변에 34개의 핵폭탄을 투하하라.

최소 6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34개와 60년 그 숫자 속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들어있는지

그는 계산하지 않았다.

한반도와 만주가

인간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될 뻔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가 물었다.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고 있는가.

트루먼이 대답했다.

"핵무기 사용은 미 야전 사령관의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통상적 고려 사항이다."

세계가 얼어붙었다.

영국 수상이 비행기를 탔다.

프랑스 수상도 달려왔다.

워싱턴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말했다.

미국이 중국과 싸우는 동안

소련이 서유럽을 공격할 수 있다.

핵전쟁이 유럽으로 번질 수 있다.

그것이 핵사용을 막은 이유였다.

유럽의 안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비밀리에 명령했다.

전술핵무기 9발을

B-29 폭격기 부대로 옮겨라.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것이었다.

카데나와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미군이 핵폭탄을 조립했다.

마지막 부품만 빼고.

그것은 실제 투하 직전에 넣는 부품이었다.

모의 훈련도 실시했다.

B-29가 오키나와를 날아

북한 지역으로 비행했다.

모의 핵폭탄과 재래식 폭탄을 투하했다.

실전 투하의 모든 과정을 연습했다.

그러나 핵폭탄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소련이 핵으로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

유럽이 불안해할 가능성.

미래의 전례가 될 가능성.

그리고 한반도 지형적 특성으로 인한

전술적 효율성 문제.

북한, 중공군이 한 곳에 밀집하지 않아

분산된 적에게 핵폭탄은 비효율적이었다.

맥아더가 그래도 계속 핵 투하를 고집했고

트루먼은 하극상을 이유로 맥아더를 경질했다.

그러나 핵폭탄 대신

또 다른 무기가 의심받았다.

세균전 의혹이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폭탄.

바람을 타고 내려온다는 병균,

곤충과 깃털 속에 숨었다는 죽음,

탄저균.

보툴리눔 독소.

한탄 바이러스.

세균전 의혹은 미국이 자초했다.

일본 항복 직후 자행된

반인륜적인 암거래 때문이었다.

일본 731부대가 만주에서

살아 있는 인간을 생체실험 해 만든

피비린내 나는 악의 자료를

미국이 면죄부를 주고 손에 넣은 것이다.

731부대에서 죽어간 3천 여 명의 희생자중

조선인이 중국인 다음으로 많았다.

그들은 실험실과 영하의 벌판에서 살해당했다.

마루타라 불렸다.

통나무.

사람이 아니라 통나무였다.

미국이 종전 직후 악마의 실험을 한 자들과 직거래했다.

맥아더 휘하의 미군 정보 대장 윌러비가

731부대총책임자 이시이 시로와 만났다.

거래의 내용은 단순했다.

자료를 주면 면죄부를 준다.

이시이는 살았다.

1959년 자연사할 때까지.

그의 부하들도 살았다.

전후 일본 의학계 유명인사로.

면죄와 거래 속에

전범들의 기록은 살아남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절규 위에

피로 적힌 자료들은

새로운 강대국,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세균전 연구소로.

그 흉악무도한 암거래의 그림자는

한국전쟁의 하늘에도 드리워졌다.

중국과 북한이 주장했다.

“미국이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부인했다.

소련이 조사 기구를 만들어 사실이라고 했다.

미군 조종사들이 포로가 됐다.

세균전에 참여했다고 증언했지만

귀국 후 번복했다.

그들의 입이 어떻게 닫혔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진실은 지금도 안개 속에 있다.

의혹은 사실인지 아닌지

끝내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731부대를 계승한 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의지는

정전협정으로 굳어진 한반도에서

그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15년 서울 용산미군기지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반입됐다.

주피터 프로젝트라 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생물 대응 실험.

1g으로 100만 명을 몰살할 수 있는 보툴리눔.

탄저균.

한국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SOFA가 통관 절차를 면제했기 때문에.

아무도 검사하지 못했다.

세계 25곳의 미군 생물무기 연구소가

자료를 한국으로 보낸다.

분석하기 위해.

왜 한국인가.

북한과 가까워서인가.

SOFA 덕분에 통제가 없어서인가.

한국 시민단체들이 외쳤다.

중단하라.

미국은 답하지 않았다.

SOFA가 있으니까.

특권이 있으니까.

용산과 오산의 주한미군 기지에서

오늘날에도 생물무기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가.

한반도의 전쟁은

국가가 어디까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승리라는 말이 어디까지 잔혹할 수 있는지,

핵과 세균과 공습이

국제적 법규와 윤리의 벽을

얼마나 쉽게 파괴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잔혹한 물음표였다.

그런데도 전쟁 뒤의 세계는

묻지 않았다.

누가 파괴했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누가 사과해야 하는지,

누가 조사해야 하는지.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는 1천 명의 조사단을 보내

화염공습 피해를 정밀 조사하고 배상했다.

북한에는?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물론 배상도 없었다.

독일은 서방의 동맹이 될 나라였다.

북한은?

조사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강행된 북한에 대한 공습은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하나이면서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

왜 모르는가?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자신들의 신화를 부수기 때문이다.

‘자유를 수호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신화를.

미국인들은 모른다하고

한국인도 말하지 않는다.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몇 년 전

미국 국빈 방문에서 말했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감사는 진실을 가릴 수 없다.

미국은 왜 한국전에 참전했는가?

남한 주민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는가?

1890년대 조선과 수교한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일관되었다.

국익 추구였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강탈을 간접 승인하고

36년간의 독립운동을 외면했다.

일본 항복 후,

미국의 남한 점령은 소련 견제가 목적으로

친일파를 군과 경찰에 그대로 재활용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용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강행했고

제주 4.3이 반대하자 주민 1/10을 죽였다.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일본의 공산화가 두려워 개입했다.

이것이 미국의 ‘희생’의 실체다.

물론 그 결과 한국이 혜택을 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혜택은

미국의 선의가 아닌,

미국의 전략적 필요의 부산물이었다.

총성이 멎은 지 70년이 넘었다.

그러나 평화협정은 없다.

정전협정이 있을 뿐이다.

주한미군이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견제하게 위해

계속 주둔하기 위해서

한반도 분단은 필수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휴전.

그 동안 핵폭탄이 남한에 배치됐다.

중국과 소련 위협용이었지만

동시에 북한을 자극했고

결국 북한도 핵을 만들었다.

2026년 한반도에는 진화된 형태의 위협이 있다.

핵우산은 보호라 불리고

전략자산은 억제라 불리며

새로운 공포는 기이한 언어로 포장된다.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이란 날개를 달고

대만 유사시 참전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겠단다.

강대국간 전쟁은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한국도 전쟁터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국제법에 저촉되기도 한다.

한국이 주한미군 기지를 통해 제3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허용하는 경우

국제법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유엔 헌장, 국제관습법, 국가책임법 원칙이다.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무력 사용 금지), 제51조(자위권)는

국가의 무력행사와 다른 국가에 대한

지원의 적법성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국제법규이다.

국제관습법은 ‘국가는 자국 영토가

다른 국가에 대한 불법적인 무력공격에

이용되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국제법위원회의 국가책임 초안제16조는

다른 국가의 국제위법행위를 알면서

원조하거나 지원한 국가의

책임에 관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2026년 이란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사우디, 오만 등에 있는

미군 기지와 함께 해당 국가시설도 공격하는 경우,

중국이 성주 사드에 대한 보복을

한국에 10년째 하고 있는

배후 요인이 무엇인지 한국 정부, 언론은 입을 열지 않는다.

최근 주한미공군기와 중국공군기가

서해상에서 대치했는데

한국 정부는 뒤늦게 알았다며 항의하자

주한미군사령관이 ‘무슨 소리냐?’며 맞받았다.

한미동맹에 의해 허용된

주한미군의 군사행동이라 했다.

전략적 유연성의 숨은 뜻에 대해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설명치 않았다.

적절한 것인가?

한국정부가 SOFA에 묶였다며

침묵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행복할 권리에 역행한다.

그것은 반헌법적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미국 대통령의 선제공격 발언에도

한국 정부는 침묵하는 것이 관행이다.

선제공격 후에는 한반도 전면전이 불가피하다.

한반도 남북이 다 죽을 수 있다.

침묵하는 정치, 언론, 학계도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도 침묵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바보라서 그런가? 벙어리인가?

북한핵에 대한 공포와 대처가

미국의 핵우산과 미국의

한반도 전략만으로 해소되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동서해 하늘에서

중국러시아가 합동군사훈련하고 있다.

오산, 군산의 활주로에는

전략폭격기의 그림자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오늘도 미군기지 어딘 가에서는

탄저균 실험이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의

헬지옥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핵은 평화의 도구가 아니고

세균전은 결코 방어가 아니다.

국제법은 강자의 장식품이 아니라

약자의 마지막 방패여야 한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 대통령에게 강하게

말해야 한다.

" 이 땅에서 미 국익을 위한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지난 70 여 년간의 한미동맹을 돌아볼 때

한국의 자주권 회복이 급선무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다가

정전협정은 지속되고

주한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는 더욱 강해진다.

그 결과 한국 민주주의도 쪼그라들고 있다.

평화는 망각과 의존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평화는 진실 위에만 세워진다.

언젠가 155마일 휴전선의

철조망 위에 진달래가 피고

판문점의 콘크리트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르는 날,

그날 비로소

이 땅은

미국의 전략기지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89 2026.06.2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8-38선의 밤, 6.25의 비극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칠십육 년 전 그 새벽,

포성이 강산을 뒤흔들고

한반도의 산과 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전쟁은 멈추었으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총성이 침묵한 자리에는 철조망과 지뢰밭이 뿌리내렸고,

휴전선은 세월보다 길게 민족의 가슴을 갈라 놓았다.

남과 북은 서로를 경계한 채 군사분계선의 긴 침묵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묻는다.

언젠가 철조망이 걷히고,끊어진 철길이 다시 이어지며,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의 노래가

울려 퍼질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칠십육 년,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평화를 꿈꾸는 마음 또한끝나지 않았다.

분단의 세월보다 더 긴 희망이

오늘도 이 땅의 새벽을 밝히며,

우리는 다시 내일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하늘에는 해방과 독립의 깃발 대신

두 강대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북위 삼십팔도선,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어진 산맥의 핏줄 위에

그어진 경계는 형제를 적으로 만들고

마을의 논두렁을 세계전쟁의

최전선 예비지역으로 바꿨다.

미국은 유엔의 이름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고,

반대하는 이들의 외침은

총성과 화염 속에 묻혀 갔다.

친일의 잔재는 새 주인을 맞았다.

워싱턴의 지도 위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대소 전진 기지가 되었고

일본은 태평양의 성채가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모택동의 붉은 군대가 강물처럼 흘러넘쳐

장개석의 군대는 무너져 갔다.

남북에 만들어진 두 개의 정부는

하나가 되자는 의지가 전혀 없었고

삼팔선의 밤은 자꾸 뜨거워지고 있었다.

남북한 정부 수립 이후

공존이나 평화적 통합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양측 지도자가 모두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를 자처하며

무력 또는 체제 우위를 통한 통일을 추구했다.

동시에 냉전이라는 국제질서가

타협의 공간을 크게 제한했다.

두 정부의 상대에 대한 적대적 태도 속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은

안개 낀 능선과 개울가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다.

수색대의 총성이 터지면서

개성과 춘천, 옹진의 들판에는

젊은 병사들의 피가 스며들었다.

1949년 6개월 동안 사백 번 넘는

남북 군사적 충돌.

총알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한군은 삼팔선 북쪽에

방어진지를 세우려 했고

북한군은 포화로 응답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다.

“우리는 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 정부에

중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을 자극하는

불길이 한반도에서 시작돼

세계대전으로 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 클럽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연단에 섰다.

"미국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극동지역의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유엔헌장에 입각해

전체 문명세계와 함께 싸울 것이다."

애치슨은 의회에서 말했다.

"남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기는 어렵다.

미국도 그런 침략을 군사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남침은

순식간에 전선을 무너뜨렸고,

서울은 곧 불안과 피난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한은 지킬 수 없다"고 했던

미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북한 공격을 방치하면 일본이 위험하고,

동북아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소령과 중국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미국이 즉각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고

결의안 82호(25일), 83호(27일)에 이어

84호(7월 7일)가 통과되었다.

82호와 83호는 북한의 적대행위 중단과

회원국들의 한국 지원을 촉구했고,

84호는 미국의 연합지휘 아래

군사적 지원 체계를 열어주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한반도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비어있지 않았다면

유엔군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의 계산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안보리 회의장에 거부권을 쥔

소련이 자리를 비운 것은

세계사의 미스터리다.

스탈린의 계산에 의한 불참이었다고

역사가들이 추측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소모전을 벌이면

소련이 어부지리를 얻고 동유럽을 장악할 수 있다는....’

소련의 빈자리가 역사를 바꿨다.

소련이 안보리를 비운 사이

결의안은 통과되었고 유엔군이 탄생했다.

21개국이 참여한 병력의 90%는 미군이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유엔군사령부'가 탄생했다.

유엔의 깃발을 들고 있으나,

미국 정부의 명령만을 받는 백악관의 군대,

그러나 미군의 총구 위에

유엔의 푸른 깃발이 휘날렸다.

유엔군은 유엔과 무관한 미 정부 부대였다.

유엔사는 유엔의 깃발을 사용하는

미국이 지휘하는 다국적군이었다.

워싱턴은 유엔의 깃발을 들고 한반도로 향했다.

맥아더는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으며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세계사의 역설이 시작된다.

유엔의 깃발아래 출전한 전쟁,

그러나 실질적 지휘는 미국의 손에 있는 전쟁.

깃발은 국제였고,

명령은 미국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유엔 헌장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군대의 지휘는 한 국가, 미국의 손안에서 행해졌다.

개전 초기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빠르게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누가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했느냐가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의 하나다.

전쟁 직전 남북한은 자체적으로

전차, 전투기, 대포와 같은

무기를 직접 생산할 수 없었고

외부의 지원, 제공 등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미국은 남한이 북진 통일을 시도할 가능성을 우려해

전차, 중포, 전투기 같은

공격형 무기 제공에 소극적이었고

남한 군대를 주로 내부 치안 유지와

방어용 군대로 육성했다.

반면 소련은 북한군을 현대적인 정규군으로 육성했고,

전차·항공기·포병을 대규모 지원했다.

소련은 해방 직후 북한의 군사조직 육성 과정에서

관동군과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일부 제공했다.

6·25 전쟁 직전 조선인민군의 주력 무기는

소련이 직접 공급한 최신 소련제 무기였다.

북한군의 전차부대와 기계화 부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다.

전쟁 초기 국군은 북한 전차를 상대할

전차나 대전차포가 거의 없었고

제공권은 사실상 북한이 장악했다.

병력 수 자체는 북한이 다소 많았지만,

결정적 차이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을까?

소련과 중국의 동의 아래

전쟁 계획이 추진되었다고 사가들은 말한다.

김일성은 6·25 전쟁 수 개 월 전인

3~5월 사이 소련과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지도부는 전쟁이 개시되면

남한에서 전국적 규모의 혁명이나

봉기가 일어나

수주 또는 수개월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장기화되고

혁명이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엔안보리에서 결의안

82호와 83호가 통과되는 사이

서울이 위험해지자 27일 밤 정부 당국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

"정부는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니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일자리를 지키라."

그러나 이승만은 이날 새벽 2시

서울을 탈출한 뒤였다.

정부만 도망가고 국민을 속인 것이다.

한강다리가 끊어졌다.

피란민들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한국군이 다리를 폭파했다.

아이들의 울음이 강물에 떨어졌고

부서진 철교 아래로

사람들의 절규가 가라앉았다.

정부 수뇌부가 먼저 남하했고,

이어 한강교가 폭파되어

많은 시민과 국군이 고립되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미군사고문단도

이승만과의 약속을 믿었다.

폭발 시점을 사전에 협의하기로 했던 약속을.

그 약속이 아무 통고 없이 깨지면서

그들도 서울을 탈출하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

그 와중에 퇴각하는 군경은

사상 전향을 서약했던

보도연맹원 등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터진 지 이틀째 되는 날

이승만이 명령을 내렸다.

“보도연맹원과 남로당원들을 처형하라.”

28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첫 처형이 집행됐다.

보도연맹은 전향한 좌익분자들을

관리하던 조직으로

그 구성원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가입했던

일반 농민과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경의 총구 앞에

이름 없는 골짜기에서

낙엽처럼 쓰러져 사법학살의 제물이 되었다.

전쟁 후 벌어진 수많은 학살은

전쟁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람을 분류해 죽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법의 이름은 있었으나

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질서는 있었으나

정의는 없었다.

전쟁은 단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아니라

이념이 인간을 죽이는

거대한 학살로 변해갔다

전쟁 직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의심하고 제거했다.

그것은 외부의 전쟁과 내부의 전쟁이

한 몸처럼 겹쳐진 참극이었다.

9월의 인천, 아침 안개를 뚫고

유엔군 상륙함이 진격할 때

일본인 항해사들이 조류를 읽고

배의 키를 잡아 안내했다.

폐허가 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 속에서

다시 살아나 병참기지가 됐다.

전후 복구의 기회를 잡았다.

패전국이 재건국이 됐다.

침략한 자가 회복하고

침략당한 자가 다시 전장이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북한군의 보급로가 끊기고 퇴각이 시작됐다.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은 물러갔다.

맥아더는 압록강까지 올라가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국경선 너머에는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버티고 있었다.

중국군이었다.

겨울 산맥을 넘어온 중공군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고

유엔군은 남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서울은 또 한 번 함락되었다.

산과 들에는 얼어붙은 시신들이 누웠고

폭격기는 북녘 하늘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맥아더는 중국 만주 폭격과

핵무기 사용까지 제안했으나

미 대통령은 제3차 대전을 두려워 거부했다.

제한전쟁이 원칙이었다.

맥아더는 고집을 피우다 경질됐다.

.그러나 미국의 공격은 북한 지역에 집중되어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북녘 산하에 투하됐다.

도시, 마을, 사람이 사라졌다.

2년 동안의 소모전 끝에 정전협정이 시작됐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반대하며 외쳤다.

“무력으로 통일하자. 전쟁을 계속하자.”

그는 정전 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미국이 분노했고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신을 보냈다.

"한국이 휴전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없다."

미국 행정부가 에버레디 작전이라는

비밀계획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북진 명령을 내리거나

돌출행동을 할 경우

이승만을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동맹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

그것이 미국이 말하는 동맹의 실체였다.

결국 타협이 이뤄졌다.

이승만이 조건을 내걸었다.

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무장할 군사적 지원 등이었다.

미국이 받아들였다.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체결됐다.

이승만은 지독한 벼랑 끝 전술 끝에

상호방위조약과 군사 지원을 얻어냈으나,

이승만이 국치스런 조약의 대가로 미국에

군사적 주권을 퍼준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이 맘먹은 대로 군사력을

한국에 배치할 치외법권적 특권을 인정하고

미국이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 소련을 향해

미 본토 수호를 위한 군사전략 SIOP를

비밀리에 수행토록 만들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지휘할

작전통제권도 미국의 손에 저당 잡혔다.

일본이 물러간 뒤 미국을

실질적 점령군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승만 그 후로도 권력을 탐하면서 민주주의 파괴했다.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죄목으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단두대에 세운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승만은 1959년 10월에도 미국에게 말했다.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다."

사사오입과 부정선거로 얼룩진

노독재자의 말로는

결국 4·19 혁명의 거대한 함성 속에

하야로 끝을 맺었다.

한국전쟁은 승자와 패자도 가리지 못하고

끝나지도 않은 채 멈추었다.

1953년 휴전이 되었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었고,

정전선은 국경이 아니었으며,

분단은 잠시 멈춘 전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총성만 멎었을 뿐

삼팔선은 철조망이 되었고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커지면서

남북 간 분단의 벽이 더욱 높고 견고해졌다.

전쟁 피해는 엄청났다.

3년 3개월간 지속된 전쟁에 21개국이 참전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략 6백여 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국가마다 집계가 서로 달라 혼란스런 가운데

남한 230 만여 명, 북한 292 만여 명의

인적 손실이 추정됐다.

또한 1천 만 명의 결핵환자,

1천 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인적 피해는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때보다 피해가 더 컸다.

모든 도회지는 거의 파괴되었고

양측의 학살과 고문 기아로 인한

사망 등이 속출했다.

참전국 군대의 인적 손실은

정확히 집계된 적이 없지만

한국군 75만 명 사상,

북한군 50만 명 사상,

유엔군 18만 명 사상,

중공군 95만 명 사상으로 추정된다.

남북한 전역이 초토화되고

주요시설 파괴는 52%에 달했다.

남한 민간인 피해는 모두 99만968명으로

이 가운데 37.7%인 37만3599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15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북한 당국은

사망자를 별도로 밝힌 바가 없다.

남북한 전 지역에서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해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포성이 멈춘 뒤에도 한반도 땅의 사람들은

무장한 평화를 살았고,

무장한 침묵 속에서

세대를 이어 불안과 증오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유엔사는 오늘날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름은 유엔이지만

실질은 미국 주도라는 점,

그리고 해체의 열쇠조차

유엔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결단에

걸려 있다는 점은

국제법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의 이름을 쓰고

유엔의 깃발을 드는 것에 대해

1975년 유엔총회가 결의했다.

“유엔사를 해체하라.”

키신저가 약속했다.

“1976년 1월 1일부터 해체하겠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1994년 유엔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가

북한 외무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유엔안보리는 연합군을

하부조직으로 결성하지 않고

단지 그 지휘권을 미국이 행사하도록 하는

것을 추천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해체는 유엔에 있지 않고

미국 정부의 권한 문제일 뿐이다."

코피 아난 총장이 거듭 확인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무관한 조직이다.”

디칼로 유엔사무부총장도

2018년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2019년 5월 캠프 험프리의 미군기지에서

유엔사 부사령관 웨인 에어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단지 유엔사는 유엔 깃발을 사용하고

매년 미국 정부를 통해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유엔의 깃발을 사용하면서도 유엔이 아닌

해괴한 미국의 군사조직은

여전히 한국에서 버티고 있다.

무장지대 DMZ의 통제권과 관할권은

여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지금도 유엔사 깃발은

평택의 기지와 판문점에서

비무장지대에서 펄럭이며

소리 없이 말한다.

“이것은 유엔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유엔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유엔의 군대는 아니라는 논란 속에서

그 조직은 지금도

비무장지대와 정전협정을 관리하고 있다.

유엔사 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관,

연합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국 정부를 향해

떵떵 큰소리를 치며 위세를 부린다.

그 모습은 점령군 대장과 너무 닮아 있다.

미국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들이

분단된 한반도를

자신들의 최상의 적정선으로 여기는 오늘날,

유엔사의 깃발을 다시 키워

미군의 군사적 특권을 유지, 확대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대통령과 장군들이 사라졌어도

한반도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그날 삼팔선에서 시작된 총성은

형제의 가슴 속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혁명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이름 없는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울부짖었다.

폭격 속에서 아이를 업고 달리던 어머니,

끊어진 다리 앞에서 강물을 바라보던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노모의 눈물이

이 전쟁의 진짜 역사였다.

강대국들은 전략을 말했고

정치인들은 통일을 외쳤지만

폐허 속 민중은 평화를 원했다.

오늘도 비무장지대의 철책 위로

바람은 지나간다.

그 바람은 묻는다.

누가 이 땅을 둘로 갈랐는가.

누가 형제를 적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전쟁으로 권력을 얻었고

누가 이름 없이 죽어갔는가.

그리고 또 묻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과연 누가 끝낼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41 2026.06.24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7- 여순사건과 6.25 전후 학살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한라산이 거대한 무덤이 되어 갈 때

송요찬의 서슬 퍼런 포고령이 나왔다.

"제주 해안선 오 킬로미터 밖의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던

1948년 10월 19일 밤 .

바다 건너 여수항의 병사들에게 명령서가 왔다.

“제주로 가라.

제주 형제들을 총으로 쏴라.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을 진압하라.”

지창수를 비롯한 하사관등 제14연대는

분노하며 거부하고 총을 잡았다

“동족을 죽이러 갈 수 없다.

조선의 아들이 조선의 아들을 겨눌 수 없다.”

그 거부는 봉기가 되었고

그 봉기는 곧 이름 싸움이 되었다

누군가는 반란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항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져도

그날 피어난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무엇이 나라인가

무엇이 군대인가

무엇이 양심인가

출동 거부의 함성은 새벽어둠을 찢는

횃불이 되어 남녘땅을 흔들었다.

여수 시민들이 곧 상황을 이해하고 환호했다

경찰서는 점령되고,

여수의 밤은 혁명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20일 새벽이 밝자 14연대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 한다.”

그들의 요구 또한 명료했다.

“동족상잔 반대, 미군 철수.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여수 시민 수천 명이 모인 인민대회가

결의문을 발표했다.

“친일파를 몰아내라.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라.

토지를 농민에게.

식량을 굶주린 자에게.”

창고가 열려 쌀이 시민들에게 배급됐다.

인민위원회가 다시 서고

여수는 거대한 항쟁의 바다가 되었다.

순천 시내도 순식간에 봉기군의 손에 넘어가

세관과 우체국, 모든 관공서가 점령되었다.

봉기의 불길은 여순에 이어 벌교, 광양으로 번져갔다.

10월 20일 오전.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가 모여

봉기는 신속히 진압되어야 한다고 결의할 때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진압하라”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미국의 냉전 논리에는

최소한의 양식도 없었고

미군 장교들은 진압작전에 직접 동행했다.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될 때

그 자리에는

미국인 고문들이 함께했고

한국 진압군에 합류했다.

대전, 전주, 부산, 대구에서 한국군 11개 대대가

박격포, 장갑차와 함께 왔다.

경비정과 경비행기까지 왔다.

육군과 해군과 공군의 합동작전.

군 역사상 최초였다.

10월 22일까지 전라남도 37개 시·군이

봉기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제14연대는 세 개의 편대로 재편되어

서쪽 벌교, 북쪽 학구, 동쪽 광양으로 진출했다.

초기 진압에 밀리자 정부는

10월 25일 여순지역 계엄령을 통과시켰다.

대통령령 제13호

그러나 계엄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법 없이 선포된 계엄, 그것이 바로 폭력의 본질

계엄 아래에서 군은

‘즉결처분권’을 행사했다.

그것은 어떤 법적 근거도 없는

권력이었으나

군인들은 그것을 학살의 면죄부로 삼았다.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했다.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어떠한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

그 말은 담화가 아니라

수많은 죽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백운산과 지리산, 웅석봉으로

반군들이 퇴각하고

진압군이 휩쓸고 간 여수와 순천에서

군과 경찰은 모든 시민을

학교 운동장으로 오게 했다.

남녀노소 불문, 갓난아기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어야 했다.

운동장 한쪽에는 참수대가 설치되었다

도끼와 칼, 그리고 나무 블록

법정도 없고 판사도 없고

오직 증오와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반군 색출이 시작됐다.

기준이 있었다.

손바닥에 총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 자.

군용 속옷을 입은 자.

흰 고무신을 신은 자.

흰 고무신은

인민위원회가 배급한 것으로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이 죽음의 표식이 됐다.

손가락질 한 번 또한

'손가락 총'이 되고

학살자에게 즉결심판 판결문이 되었다.

우익청년단원과 밀고자들이

군경에게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판이 없었다.

변호가 없었다.

증거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결정했다.

죄가 없어도 지목되면 죽음이었다.

그것이 1948년의 정의였다.

그것이 미군사고문단이 지원한

진압작전의 정의였다.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한 달 반 동안 운동장은

매일 인간도살장이 되었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모였고

저녁에는 시체들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군법회의는 광주와 대전에서 열려

수천 명의 혐의자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다.

변호인은 없었고

증인은 없었고

진실은 없었고

오직 유죄 판결만 있었다.

여순과 주변 지역의 땅은 시체로 숲을 이루고,

바다는 핏물이 되었다.

정부 조사관이 파견되어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1949년 1월 10일까지의 피해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인명 피해 총 5,530명

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

가옥 피해 8,554호

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

재산 피해 추정액 99억 1763만 395원

그 시대에 그 액수는 천문학적이었다.

구호가 필요한 사람 6만 7332명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일 뿐

진실은 훨씬 더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이

땅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여순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자

이승만은 군대를 청소했다.

숙군이라 불렀고

4,749명이 축출됐다.

전군의 5%.

광복군 출신들과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사라졌다.

양심 있는 장교들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박정희.

여순사건과 연루됐지만

숙군 작업에 적극 협조했다.

살아남아 18년간 한국을 지배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윤석열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여순사건이 끝난 지 두 달 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지 두 달 만이었다.

친일파를 처벌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지자마자

친일파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

11만 8천 명에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여순사건이 그 법의 자궁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는 법.

동족을 적으로 만드는 법.

7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국보법은 온 나라의 입과 귀를 막는

거대한 사상적 감옥을 완성했다.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짐승들."

언론과 문인들은

제주, 여순 봉기군과 그 조력자들을

'귀축(鬼畜)'이라 부르며

인간의 범주에서 지웠고,

이 잔혹한 '절대 악'의 프레임은

곧 국가적 반공 체제의 주춧돌이 되었다.

제주와 여순 등에서 시작된

동족 학살의 광기는 남녘산하를

무차별의 초토화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이념을 민족에 우선하는

반역사적 냉혈한이 되어버린

비참한 역사는

더 거대한 비극으로 흘러갔다.

1980년 5월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소속 군인 아무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죽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여수의 병사들은 거부했다.

제주 형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1948년 10월의 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거부는 그냥 반란이 아니었다.

거부가 인간이었다.

그날의 여수와 순천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이 찢기고

냉전의 칼날이 한반도에 꽂힌

비명 중 하나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누가 총을 들었는가?

누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가?

두 질문은 얼마나 더 오래 남아야 하는가?

여수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순천의 새벽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사이를 떠도는 이름 없는 영혼들이

오늘도 바람 속에서 묻고 있다

나라란 무엇인가?

양심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람으로 남는가?

이승만과 미국에 의해 자행된

즉결심판과 학살의 피 바닥 위에

또 다른 시대가 세워졌다

전쟁이 왔고 반공의 깃발이 더 높이 올랐고

의심은 법이, 법은 폭력이 되었고

폭력은 다시 질서라는 옷을 입었다

보도연맹과 거창의 이름 아래

6.25 전쟁 속에서 같은 종류의 비극이 번져갔다

학살은 단발이 아니었다.

학살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한 번의 명령이 다음 명령을 낳고

한 번의 침묵이 다음 침묵을 낳았다

죽은 자는 이름을 빼앗겼고

살아남은 자는 고통 속에 침묵했다.

빨갱이의 자식

반란자의 집안

그런 말들이

무덤과 함께 오래 남아

피해자들의 삶을 두 번 죽였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기억하고

무덤 없는 죽음들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흙은 입을 열었고

바람은 결국 기록이 되었다

묻힌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회는 뒤늦게 이름을 불렀고

국가는 뒤늦게 사과의 문턱 앞에 섰으며

희생자들은

겨우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어

여순사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2021년 6월 29일

21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의 진실을

밝힐 첫 계단이 만들어졌다.

사건 발생 73년 만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침묵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422 2026.06.22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6- 제주4·3, 한라산은 통곡한다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해방

일장기가 내려졌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서

점령군의 이름으로 말했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은 다시 점령이 됐다.

제주에도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어제까지 일장기를 달고 조선인을 잡던 자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자들.

제 민족의 살을 뜯던 자들.

그들이 돌아왔다.

이번엔 성조기 아래에서.

미군정이 그들을 불렀다.

해방된 조국에서

제주 사람들의 꿈은 다시 짓밟혔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제주 북초등학교 앞마당.

사람들이 모이면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이 아이를 쳤다.

아이가 피를 흘렸다.

분노한 군중이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했다

6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찰의 잘못이지만 정당방위였다.”

그들의 결론이 도화선이 되었다.

아이의 울음에서 시작된 것을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만들었다.

죽인 자가 피해자가 됐다.

맞은 자가 가해자가 됐다.

민심은 들끓었고

남로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전단지 부착, 사상자 구호금 모금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

23개 기관, 105개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제주 직장인 95%인 4만여 명이 참여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했다

섬 전체가 울부짖었다.

미군정이 조사단을 파견했다.

카스티어 대령의 보고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

조병옥 경무부장 발언 : “90%가 좌익 색채”

27만 명의 섬 주민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

육지에서 건너온 잔인한

서북청년단과 421명의 응원경찰이

섬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일 년 동안 2천5백 명이 잡혀가

좁은 유치장에서 앉지도 못한 채

생지옥의 고통을 당했다.

대립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1948년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남한 전역에서 터져 나왔다

그 중심의 하나가 제주도였다

4월 3일 새벽 두 시

한라산 자락 오름마다 핏빛 봉화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의 무장대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급습했다

그들이 외쳤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조국의 통일독립."

"단독선거 반대."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을 지목해 살해했다

5·10선거를 전후로는 선거 관련자를 집중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까지 학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4월 17일 미군정 딘 군정장관이

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명령했다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

김익렬 제9연대장이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4월 22일 전단지를 살포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동족상잔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 악수를 원한다.”

4월 28일,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만나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진적 무장 해제.

주모자 신변 보장.

평화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5월 1일, 동족상잔을 멈추자던

사흘간의 평화는 대낮에 오라리 마을이 불타면서 깨져버렸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 주장했으나

김익렬은 현장조사 끝에 진범을 밝혀냈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방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의 보고를 묵살했다

CIC는 "폭도의 소행"으로 조작했고,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다

마치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된 가짜 영화였다

미군은 지상과 상공에서 불타는 오라리 동영상을

‘제주 폭동’의 소재로 악용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열었다.

조병옥은 “계획된 공산폭동”이라며 강경작전 주장.

김익렬은 “경찰의 실책, 무력위압과 선무공작 병행”을 주장하며

조병옥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결론은 강경 진압이었다.

5‧10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온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됐다.

평화를 말한 자가 쫓겨났다.

학살을 선택한 자들이 남았다.

후임에 박진경 중령이 임명됐다.

미국 정부와 서울의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 등)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내며

강경 진압에 목을 맸던 이유는?

냉전을 주도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었다.

당시 미국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 했다.

남한단독 정부 추진으로

동북아에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남한은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만들고 싶었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미국 극동 아시아 정책의

성패가 걸린 최대 과제였다.

만약 제주도에서의 저항 때문에

5·10 선거가 실패한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냉전 주도권을 소련에 빼앗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거가 임박하면서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남한 전역에서 줄을 이어 발생했다.

좌파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에 반대했다.

특히 제주도에서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한

무장봉기가 벌어지자 미국 정부는 크게 긴장했다.

미국은 제주4·3에 대해 소련 공산당의 사주라며

가짜뉴스를 앞세웠다

“소련 잠수함이 제주 연안에 출몰했다.”

남한 언론과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언론은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채질하는 도구가 되었다.

서울의 미군정이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로

둔갑시킨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민들을 '잔혹한 빨갱이'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묘사했고,

군경의 잔인한 초토화 작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진압으로 미화했다.

이 조작극은 제주도의 참상을 외면하고,

증오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3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초토화 작전에

잔인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전국의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선거를 외면해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해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게 된

브라운은 호언장담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2주일이면 평정된다.”

그는 초강력 작전을 지시했다

“경찰은 해안 4km까지 치안 확보하라.

경비대는 서쪽부터 동쪽까지

빗자루로 쓸 듯 휩쓸어버려라.

해안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하라.”

작전이 시작돼 6주 동안 4천 명이 체포됐다.

미군 보고서는 성공적 작전이라 평가하면서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그러나 1948년 6월 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이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후 제주도의 비극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깊은 광기와 초토화가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여수 14연대가 제주 출동 명령을 받자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선언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마저 미군 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의 포화 속에 진압되고

3천4백 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된 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정부의 최고 지령'을 받들어

제주도에 포고령을 내렸다.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도로 인정해 총살하겠다."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뒤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되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눈 쌓인 겨울 한라산으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에게

협조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학살극의 대상이 되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기록했다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 점령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마을 수백 개가 한꺼번에 불타 연기가 하늘을 가렸고,

할아버지와 손자, 어머니와 젖먹이가

한자리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은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자들에 대해 증언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 불응,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입버릇처럼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했다.”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마약 중독자였다.”

토벌대의 총구를 피해 눈 덮인

한라산 깊은 숲으로 도망친 도민들,

늙은 시부모의 손을 잡고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부인들은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얼어 죽고

굶어 죽어 한라산의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일본군 준위 출신 함병선이 이끄는

제2연대와 서북청년회로만 구성된 대대 병력은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사살하는

가혹한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1948영 11월 15일 가시리

군인들이 마구 총을 쏜 뒤 소개령을 내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표선리 표선국민학교에 수용해

‘도피자 가족’ 76명을 한 달 뒤 버들못에서 학살했다.

12월 18일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제9연대 제2대대가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시켰다

희생자 11명 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1992년,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취재반이

다랑쉬굴을 발견하고 현장조사해

언론 보도 이후 유족과 도민들이 건의했다.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

그러나 행정·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은 시멘트로 봉쇄되었고

주변에는 철조망이 쳐졌다

1949년 1월 북촌리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하자

대대 병력이 출동해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틀 동안 300명 이상 희생돼

젊은 남자가 대부분 사라졌다.

한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이라 불렸다.

3월, 유재흥 대령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부임해

소위 ‘선무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

흰 옷을 매단 백기를 들고

1만여 명의 피난민이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이 제주를 떠난 후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법의 최소한의 절차도 없는 불법적인 군법회의는

젊은 남자들은 사형·무기·15년형 등 중형,

여성들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죄,

결국 1,660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194명이

군인들에 의해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희생자 중 한림지역 62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1956년 3월 몰래 수습되어

한림면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혔다

나머지 132명의 시신은

1956년 5월 유족들의 청원을 당국이 받아들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곳에 세워진 위령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백 명의 할아버지에게 한 명의 손자뿐이라는 뜻

그러나 5·16 이후 위령비는 파괴되었다

학살 현장에서는 총기류, 실탄, 뼛조각이 발굴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좌익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예비검속법’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법령 제11호로 폐지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불법적으로 부활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시했다.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라.”

붙잡힌 사람들은 각자 안보에 미치는 위해 요인에 따라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고

8월 30일, 한국 해군 정보장교는

제주 경찰에 전문을 보냈다

“9월 6일 이전에 C, D 그룹을 전원 총살하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어 암매장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서귀포·성산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들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불법적인 군법회의로 전국 각지 형무소에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1950년 7월경 집단 학살당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학살극은 멈추지 않았다

제주4·3은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무장대원 체포, 한라산 입산금지 해제

공식적인 전체 사망자 14,03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이것은 공식 숫자다.

실제는 더 많다고 역사는 말한다.

제주 인구 27만 중 3만이 희생됐다.

어떤 이름은 기록됐다.

어떤 이름은 바다에 뿌려졌다.

어떤 이름은 섯알오름 흙 속에 묻혔다.

어떤 이름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실은 갇혔다

미군은 학살 현장을 기록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50년간

제주도민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고통은 짓눌린 채 견뎌야만 했다

외부 세계의 어느 누구도

미국이 주도한 테러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이 비극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조차 없었다

대량 학살 책임자를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물론

시민권 회복 노력, 거짓 주장으로

피해자를 욕되게 만든 허물을 벗겨주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출범

그제야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2018년, 제주4·3 70주년

10만인 서명 운동

“미국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서 외쳤다.

그들의 요구

첫째, 미국은 제주4·3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라

둘째,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라

셋째,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하라

이미 수많은 자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제주 학살은 미군정 시절,

미군이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후도 역시 미군이 지휘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과 하지 사령관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되어

임시군사고문단 설치되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의 임무는 무엇 이었는가.

대한군사원조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 이양과

한국군 편성 및 훈련지도

그뿐 아니라 한국치안대(육군·해안경비대·경찰)

조직, 관리, 무장, 훈련

38도선 방어, 불순세력 제거와 게릴라 침투방지,

해안질서 유지 자문.

국가기록원이 확인했다.

“미군사고문단이 제주4·3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제주4·3학살 책임을 공식적으로 가리는 작업,

그 심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최근 일각에서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자고 나오는 모습

친일파를 옹호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군을 점령군에 준하는 특권을 준 독재자에게

기념관을 세우려는 그들

그것은 대단히 역겨운 일이다

제주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미국은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도 완전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의 죄를 묻자는 외침은

“빨갱이”라는 낙인 아래 짓밟혔다.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끌려갔고,

해방의 꿈을 말하던 청년들은 총살되었으며,

정의와 통일을 말하던 목소리는 침묵 당했다.

친일은 친미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일제를 섬기던 모습 그대로

새로운 상전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신들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다.

세월이 흐르자

폐허 위에 세워진 경제성장의

빌딩들을 가리키며 노래한다.

“모든 것이 미국 덕분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겠다 다짐한다.

번영의 그림자 아래에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시민들의 신음이 묻혀 있었다.

제주 한라산의 검은 숲에서는

아직도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예속의 사슬을 끊지 못한 통한의 70여 년,

독립운동가의 무덤 위에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려는 역겨운 몸부림이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비극의 나라가 되었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친일에서 친미로 이어진 세력이

여전히 역사를 지배하는 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는 한.

미국의 비밀문서가 여전히 봉인되는 한.

3만의 이름이

모두 불릴 때까지.

미국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한라산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제주 4.3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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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 2026.06.1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5- 미군정과 친일파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독일이 항복하고 석 달이

지난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폭탄이

약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해

도시 인구의 약 39%를 소멸시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주저하자

사흘 뒤인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어

약 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같은 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160만 보병, 2만 7천 문의 대포

5,600대의 탱크, 3,700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만주벌로 진군했다

관동군 100만은 그 적수가 되지 못하고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의 탱크 400대는 소련의 철갑 앞에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소련의 군대가 움직인 그 날

트루먼은 일기에 썼다

"스탈린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항복을 주저한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인가.

나치 군을 궤멸시킨 세계 최강

소련을 향한 무언의 견제인가.

강대국들이 앞 다퉈 연구하던

원자탄을 미국이 개발한 것에

세계열강은 주목했다.

일본, 독일도 다 이 무기를 만들면 세계를

지배할 거라면 열을 냈지만

미국이 과실을 맨 먼저 딴 것이다.

무력이 국력이고 그것이 승패를 가리는 세계는

미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자폭탄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국가 간의 관계도 이전과 달라졌다.

미국은 원자탄을 인류 최초로 발명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소련은 절대적 군사력을 과시한

미국의 요구에 순응했다.

8월 10일,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북위38도선’제안을

두 말 없이 받아드렸다.

원자탄이 동북아에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일본 진격을 막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민족의 동의도 없이 강대국 둘이

조선의 허리를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서울과 남쪽의 1,600만 영혼은

자본주의 장막 안으로,

평양과 북쪽의 900만 삶은

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이념국가들에게 장악됐다.

1945년 8월 9일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소련군은 웅기·나진·청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8월 21일 원산을 점령한 뒤 8월 26일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에 들어선 소련군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였다

소련군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1945년 10월 3일 공식 출범한 소비에트 민정청은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될 때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전면에 조선인 행정 기구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배후에서 북한 지역을 통제하는

간접군정 체제를 구축했다.

9월 19일, 원산항에 한 배가 들어왔다

66명의 조선인 붉은군대 장교와 함께

젊은 게릴라 지휘관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김일성

소련군은 그를 영웅으로 소개했다

"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점령군으로 상륙했다

성조기를 앞세운 존 하지 중장은

일제의 마지막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는 미 정부의 지시를 집행했다

"조선인의 어떤 자치기구도 인정하지 말라"

"일본인 관리와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을 고용하라"

하지 중장의 첫 번째 과제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 40만 일본인의 송환

그리고 1천 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미군정에 잔류시키는 일 이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일본인 관리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인은 여전히 2등이었고

일제의 잔재는 미군정하에서 현실 이었다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가 득세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일본의 앞잡이가 다시 권력을 잡다니"

"해방이 이렇게 무색할 수 있나"

그러나 미군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반공의 보루를 위해

친일파는 용서받았고, 되레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민족정기는 짓밟혔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

한반도 남북에 진주한 두 국가의 정책은 달랐다.

소련은 조선인의 자생적 기구를 인정했다

조만식의 인민위원회와 함께 일하는 형식을 취했고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실행했다

미국은 조선인의 자치기구를 불허했다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를 복귀시켰고

민족정기를 짓밟았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식 혁명이 진행되었고

남에서는 반공국가가 세워졌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호명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 속에 권력을 세웠다.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체제로 갈라졌다.

한쪽은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 두 이름 아래

공통으로 흐르던 것은

외세의 전략과 냉전의 공포였다.

남한에 온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미군사고문단(KMAG)을 만들었다.

40보병사단 미군 장교 18명이 차출돼

남한 각 도에 조선인 치안경찰대를 조직했다.

조선인 경찰대 인력을 선발하는

기준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을 우대한다.

광복군, 독립군 출신은 근대적 기준에 미달한다.”

그 기준을 만든 자들은 미국인이었다.

그 기준을 집행한 자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 이종찬, 백선엽 등이었다.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열렸다.

조선인을 미국식 군대로 양성하는 곳이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간 자들은 영어 회화가 가능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종찬, 백선엽, 그리고 수많은 친일파

일본 육사 출신이 특혜를 받았다.

영어학교 학생 선발을 시작했을 때

광복군 출신은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광복군 출신은 미국식 규율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충성도, 즉 친미 성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 주인이 된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꼬리를 흔들었지만

광복군 출신은 그렇지 않았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자들이

미군에게서 권력의 완장을 받았다.

군사영어학교는 친일의 온실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자들이

해방된 나라의 군복을 입었다.

노덕술, 하판락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 군정의 배려로 경찰복을 입고

민중 앞에 나타났다

조선인을 짓밟던 일제의 개들은

해방정국의 공무원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비호했다.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했다.

1946년 대구 사건이 터지고

일제 경찰 청산 목소리가 높아져도

미군정은 수용을 거부했다.

미 군정청 조선인 2만 5천 명의 경찰.

그 중 일제경찰 출신이 5천 명.

전체의 20%.

그리고 광복군 출신은 몇 명이었는가.

달랑 열다섯 명.

열다섯.

567명의 광복군 유공자 중에서

단 15명만이 경찰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201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한다.

해방된 나라의 경찰이

누구의 나라를 지키는 경찰인지를.

왜 미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잔재를 부활시켰을까

미국은 왜 미군정을 통해 독립군 출신을 배제하고

친일파를 우대했을까.

육군 최고사령관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참모총장.

2대 참모총장. 3대. 4대....

18대까지.

모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거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22년.

독립군 출신이 한국군을 이끈 적이 없었다.

만주 벌판에서 총을 든 자들이

자신의 나라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말한다.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라고.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의존이 안보라고.

이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다.

22년 동안 군 최고사령관 옆에 앉아

자문하고 조언하고 지휘한 자들의 유산이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세웠다

그 아래 경무국과 군무국

그리고 미군사고문단(KMAG)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미군 장교 2명, 사병 4명

형식은 "자문", 내용은 "지휘"

고문단은 군사영어학교 입학생이나

조선인 경찰의 선발을 지휘했다.

해방정국에서 남한의 지배계급을 만들었다.

군사고문단은 조선인 국방경비대 5만 명 구성을 지휘했다.

조선인 병력 3개 여단 사령부 창설은 물론

서울, 대전, 부산 등에서 현지 부대를 관리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지위는 특별했다

외교관 면책 특권, 치외법권

그들은 한국의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은 그들을 제재하거나 심판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KMAG의 초대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

그는 한국군과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가졌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라"

"매일의 업무를 공유하라"

"부대원을 함께 점검하라"

로버츠는 자신의 별도 사무실을 제외하고

모든 고문관들을 한국군 지휘관 옆에 배치했다

그 결과, 미군 장교는 한국군의 모든 작전을 지켜보았다

모든 결정에 개입했고, 모든 현장에 함께했다

제주 4.3의 현장에도

여순의 산골짜기에도

대전교도소의 비극에도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국방부 장관 옆에 앉았다.

참모총장 옆에 앉았다.

대대장 옆에 앉았다.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다.

한국군 지휘관이 가는 곳에 항상 동행했다.

그것이 로버트 장군의 원칙이었다.

무기를 공급하는 자가 갑이었다.

무기를 받는 자가 을이었다.

이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었다.

그 갑이 을과 함께 간 곳이 있었다.

제주도였다.

여순이었다.

대전이었다.

제주 4·3이 터질 때

미군 대위가 현지 경찰의 책임자였다.

두 대의 정찰기와 소해정 두 척이 있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학살 현장의 사진을.

미국 정부에 보낼 보고용이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2만에서 3만 명이 제주에서 죽었다.

미국은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

1948년 내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여순에서 민간인 2천 명이 죽었을 때

한국군 각 부대 옆에 미군사고문단이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이동에 동원됐다.

미국은 말했다.

우리는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준 자가 책임이 없는가.

지휘관 옆에서 자문한 자가 책임이 없는가.

갑이 을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갑의 면죄부가 되는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는 피에 물들었다

미군 대위가 책임자로 있던 부대가

남한 경찰을 통해 진압을 지휘했다

미군은 정찰기 2대, 소해정 2대를 동원했다

산악지대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미군은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4·3의 피로 물들었다.

미군 로버츠 준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미군사고문단은 현장 사진을 찍었다.

여순에서도, 대전교도소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과 함께했다

"자문"이라는 이름의 지휘, "갑"과 "을"의 관계

치외법권의 외교관들이 한국의 군경을 쥐락펴락했다.

제주 4.3의 학살 현장에

여순의 피 묻은 골짜기에

대전교도소의 어둠 속에

KMAG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미소 짓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민간인의 시신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미국 국방부 기록실에

대학 도서관 아카이브에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지켜보고 보고했을 뿐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말한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했다"

"1948년 8월까지 미군 대위가 치안대 책임자였다"

"미군정과 KMAG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미국 정부는 침묵한다

한국 정부도 침묵한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자만 기억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순천

반란 진압 과정에서 2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장교가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다

"자문"이 아니라 "참전"이었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로버츠 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소 짓는 미군 장교들 사이로

제주도민의 시신이 보인다

마틴 하트-란즈버그는 기록했다

"미군은 진압 전 과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미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출범한 뒤

미군 7만 명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 6월 철수 완료했다.

그러나 500명의 KMAG가 남아

미군 지배는 계속되었다

미군 철수 후, KMAG의 행정감독권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무초 주한미국대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KMAG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나 로버츠 장군은 있었다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마다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였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다

6·25 전쟁 후 KMAG 인력은 대폭 증원되었다.

1951년 12월 800명에서 1,8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60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권리(right)로 규정된 후,

KMAG는 합동군사고문단(JUSMAG-K)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한

한미 연합 지휘 체제의 틀 안에서,

한국군은 주한미군에 예속된 상태로

70 여년을 지내고 있다.

KMAG이 미국익을 위해 맹활약을 하면서

한국군 지휘부의 영혼과 기백은 USA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초대부터 18대까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거나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이응준, 정일권, 백선엽

그들의 과거는 일제의 장교였고

그들의 현재는 미군의 협력자였다

오늘날 한국군 일각에서 들리는 주장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다"

그것은 KMAG가 심어준 의식의 결과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슬은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 예속적인 한미동맹과

분단을 고착시키는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이승만은 일제 잔재 청산을 차단하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집권 2개월 후인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민중의 함성

그러나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완강히 반대했다

"국가가 분열된다"는 이유로

그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됐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안두희의 총탄이 그 가슴을 뚫었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다.

미국의 어둠 속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특위는 업무 개시 8개월 만에 무너졌다.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됐다.

친일파를 처벌할 법이 사라졌다.

반민특위 구성 두 달 만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을 처벌하던 법의 후예가

이제 통일을 처벌했다.

단죄받아야 할 친일세력이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했다.

국보법이 그들의 보호막이 됐다.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이

멸공전선의 제1인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2016년, 뉴스타파가 폭로했다

친일 인사 222명이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친일파 48명이

대한민국에서 다시 훈장을 받았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까지

그의 가슴에는 대한민국의 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해방은 그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두 번째 맞이한 영광이었다.

일본의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의 지배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정의 보호 아래

더 강력해졌고, 더 교묘해졌다

그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빨갱이 사냥"을 외치며

민중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감췄다

일본에게 받은 훈장을 감추고

대한민국에게 새 훈장을 받았다

그들의 가슴은 훈장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의 양심은 텅 비어 있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강이 흘러 오늘까지 이어진다.

1945년 8월의 결정이

2026년에도 살아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만든 군대의 문화가

자주국방보다 동맹을 우선시하는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국보법은 아직 살아있다.

78년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통일을 처벌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나라.

친일파가 훈장을 받은 나라.

독립군 출신이 열다섯 명만 경찰이 된 나라.

그 나라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구조 위에 한미동맹이 올라앉아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바꾸는 자의 것이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 구조의 이름은

친일과 미군정이 합작해 만든

분단 체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함께 지탱하는

주권 반쪽짜리 나라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쓰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729 2026.06.1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4- 6.25와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왔다.

“무조건 항복.”

태평양의 포성이 멎자마자,

승리의 북소리 뒤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서냉전은

총과 탱크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보와 공작,

신문 기사와 침묵 속에서도

역사는 방향을 바꾸었다.

총성이 아니라 이념의 칼날로,

지구촌의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공포로

동북아를 공산주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한 군사전략을 강행한다.

패배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동북아의 성채로 만들고,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막는 전진기지로 삼겠다.

소련은 유럽에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트루먼은 명령을 내렸다.

“미 해병 5만 명을 중국 북부로 보내라.

7함대를 황해로 진입시켜라.

장개석이 일본군 점령지역을 확보하도록 지원하라.”

트루먼은 표면적 이유로 일본인·한국인 60만 명의

송환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장개석 군을 앞세워

모택동 공산 세력을 저지하려는 노림수였다.

중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의 내전이 격화됐다.

트루먼은 일본과 한반도 점령통치를 지시하며 외쳤다.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막아라.

사회주의가 번지지 않게 하라.”

맥아더는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사령관이 되어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점령 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을 동북아 대소 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글라스와 파이프가 그의 상징이었다.

그는 트럼프의 지휘 속에서

황제처럼 굴었다.

영국도, 소련도, 중국도

자문만 할 수 있었다.

맥아더가 장악한 SCAP가 전범 재판을 열었다.

5,700명이 체포, 4,300명이 기소됐다.

98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920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짜 책임자는 살아남았다.

히로히토.

맥아더는 진술서를 변조했다.

천왕이 전쟁범죄와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이는 훗날 문서로 밝혀졌다.

왜였는가.

“천왕을 기소하면 일본인들이 반발한다.

반발이 커지면 소령과 공산주의가 파고든다.

천왕 한 명의 죄를 덮는 것이

동북아 전략에 더 유리하다.”

그것이 미국이 만든 냉전의 계산법이었다.

서울의 하지도 남한을 대소 초소로 만들라는

본국 정부 지시를

맥아더를 통해 전달받았다.

미국의 대남한 정책은

조선인의 독립 열망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소련 견제'라는 대일본 점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집행된다.

1945년 10월 중국에서 작전하던 미군은

모택동의 공산군과 수차례 무력 충돌한다.

미국은 장개석·모택동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맥아더를 앞잡이 삼아 일본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왕을 감싸고, 전범 재판 지휘하며,

일제에 복무하던 관리들을 미군정에 참여시킨다.

미국은 반인륜적인 범죄 집단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부대원 전원 면책해주는 대가로 손에 넣었다.

미국에 의해 인간 백정인

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은

살인마에서 정보 제공자로 둔갑해

전후 유력인사의 삶을 누렸다.

인간 악마들과 거래한 미국의 민낯이었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인간 괴물들을 사면하고

선혈이 낭자한 데이터를 챙겼다.

인류에 대한 범죄 기록이

미국의 군사 자산이 됐다.

나치 로켓 기술자를 풀어준 것처럼.

악마와의 거래는 냉전의 규범이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핵심 의료진은

'인체실험 데이터 및 생화학 무기 연구 자료'를

미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면책 특권을 받았다.

미국은 이 귀중한(?) 데이터를

소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죄를 묻지 않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이 주도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다.

생화학 무기 개발과

인간의 신체 한계를 측정하기 위해

최소 수천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반인륜적 실험을 자행했다.

731부대원들은 실험 대상자들을

인간이 아닌 '마루타(통나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피해자들은 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및

정계 인사, 중국인 항일군인 및 민간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이었다.

실험 대상이 된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산부, 영유아, 소년 소녀도 예외 없이

실험 대상에 포함되었다

731부대 출신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전후 일본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학장, 유명 제약회사 임원,

국립보건원 간부 등 일본 의학계의

주류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인간을 통나무로 여기며 학살했던 이들이 전후

' 의학 박사'이자 '사회 지도층'으로 대접받았다.

731부대의 만행은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으며,

과학과 의학이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민중은 해방을 외쳤지만

미군정은 질서를 먼저 말했다.

독립보다 반공,

자치보다 통제,

공작을 통한 대중조작

그것이 점령의 언어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과정에서

협상 테이블 위에 한반도의 운명이 놓였다.

미국이 제안했다. 10년 신탁통치.

소련이 반박했다. 즉시 독립.

타협안이 나왔다. 5년 신탁통치.

진실은 그랬다.

그런데 같은 날 서울의 한 통신사가

긴급뉴스를 신문사에 전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바뀐 뉴스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민중일보, 신조선보가 실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처럼 인쇄됐다.

남한이 들끓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니.

소련이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니.”

소련의 타스통신이 반박했다.

"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다.

국무부가 1942년부터 입안했다."

뉴욕타임즈 1945년 12월 28일자는

진실을 정확히 보도했다.

그러나 서울의 신문들은 계속 가짜뉴스를 실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쪽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의 검열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한 내 반소·반탁 감정이 극에 달해

좌우 대립 격화된다.

거리에서 반탁운동이 터졌다.

반소 감정이 폭발했다.

좌우 대립이 극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한 언론을 검열하던 미군정은

이 가짜뉴스를 왜 방치했는가.

맥아더 밑의 정보책임자 윌러비의 언론검열과

보도지침에 충실히 따랐던 남한 언론.

그 언론은 미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으로

남한의 반소 감정을 부풀리기 위해 동원됐다.

미국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조작 목적이었다.

거짓 보도는 남한의 하늘에 반소의 불길을 퍼뜨렸다.

좌와 우는 갈라졌고

형제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겨울 이후

분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라났다.

1946년 ~ 1947년 냉전의 심화와 미·소의 대립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열기도 뜨거워진다.

중국 대륙에서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공전한다.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소련·중국 견제할

최전방 전진기지 만들 작업에 속도를 낸다.

1946년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미국의 장개석 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시행된다.

60개 사단 무장이 가능한 4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장개석 군이 대공세를 펼친다.

위기에 몰린 모택동은 미국이 내전을 부추겨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1946년 3월 ~ 5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본회의가 열렸으나,

신탁통치 논의를 둘러싼 미·소의 입장 차이로

진전 없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미군정은 남한 내 독립 요구 시위와

총파업을 좌파 공작이라며

좌파 탄압과 언론 통제를 강행한다.

하지 중장은 좌파 신문을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로 몰아

언론사를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1947년 5월 ~ 8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양측의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하고

8월 12일 최종 결렬된다.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상정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후 정부수립을 제의했다

소련은 반대하며 미소 동시 철군과

남북 대표 참여를 주장했다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치열한 논쟁

소련의 반대결의안은 부결되고

미국의 안이 채택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본회의

미국 안을 40대 0(기권 6)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

모스크바 5개년 신탁통치 안은 묵살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발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과 우크라이나는 불참

“조선인 대표 없는 위원단에 참가할 수 없다”

1948년 1월 위원단 서울에서 임무 착수

북한 지역에 대해 소련군정이 출입을 거부하고

위원단은 활동을 계속 했다.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 과업을 계속하라”

그렇게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옆 중국 대륙에서

소련 저지를 위해 진력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고

수억 달러를 추가지원 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전세가 뒤집히고 있었다.

1948년 모택동의 군대는

만주를 장악했고

국민당의 무기와 도시를 차례로 삼켰다.

부패한 국민당은 무너졌고

미국은 장개석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징이 함락되자

미국 외교관들은 철수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 지역' 총선을 결정했다.

소련의 거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자,

유엔 소총회는 미국의 안에 따라 '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다.

1948년 5월 ~ 9월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1948년 9월 모택동 군이

만주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장개석 군의 탄약을 무더기로 노획했다.

장개석 군 내부의 자멸적인 부정부패를 목격한

미국은 추가 지원 거부를 검토했다.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는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4월 ~ 5월 공산군에 의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된다.

미국은 공관원을 철수시키면서도 대사에게

대만으로 도망치는 장개석을 따르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민족통합 주장하면서 5·10 총선거 거부한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쏜 범인 안두희는

당시 주한미군 방첩대(CIC) 소속이었다.

안두희는 다음해 6.25 전행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고

육군 포병 장교로 원대 복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동경에 있던

맥아더 휘하의 정보기구 G-2의 지휘를 받았다.

G-2는 윌러비가 대장으로

극동 전역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군사 정보 활동을 총괄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971 방첩대는

주한 CIC의 핵심이었다.

안두희의 백범 암살은 CIC와 무관한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영원한 분단으로 가는 길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1947년 말 유엔(UN)이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결의하자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선언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선생은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는 등

민족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남한 지역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구 선생과 그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은

선거를 전면 거부했다.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결국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석 달 뒤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선거 거부 이후 김구 선생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통일 운동과 반이승만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은 엄청 많았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설산 장덕수선생 등을 비롯해

이분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간 간부급 및

청년 단체 지도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됐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장개석 군이

부정부패로 패퇴했으며

남한 역시 부정부패가 자심해

희망이 없다는 판단한 결과로 알려졌다.

미국은 중국 내전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쏟아 부었다.

국민당 수뇌부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이 보낸 원조 물자와 자금이

국민당 고위 관리들의

주머니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이 준 무기가 모택동군에게

밀매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사석에서

극도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우리가 장개석에게 지원한 돈 중 수억 달러가

뉴욕의 부동산 투기나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보고,

타이완으로 쫓겨 간 장개석 정권을 포기했다.

당시 남한 상황도 타이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기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막대한 원조가 제공되었으나,

정권 비호 세력에게 불하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패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포 직전인 1950년 1월초

이승만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중단 하겠다"

'애치슨 라인' 선포 소식을

스탈린, 중국, 김일성이 들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선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지 않는다.”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오판이었는가.

아니면 유도였는가.

역사는 아직도 논쟁한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해,

산천이 핏물로 물들고 포화가 가득할 때,

패전국 일본은 축배를 들었다.

일본은 미군의 거대한 병참기지가 되어

막대한 특수를 누리고 경제를 재건했다.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나면

선거에서 패배할까 두려워하는데

맥아더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북진하려 했고

그 곁에서 정보책임자 윌러비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겨울 산맥 너머에서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장진호의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미군병사들이 얼어 죽자

맥아더는 만주를 핵공격하자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를 파면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쉰 두 나라가 협상대표로 모였건만,

중공과 대만, 남북한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이 사실상 혼자 설계한 조약으로

일본에게 파격적 특혜를 줬다.

전쟁 배상 의무를 최소화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 근거를 줬다.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빠졌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씨앗이

그 빠진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성노예, 강제징용 등 역사의 상처도 방치됐다.

1905년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그 밀약의 20세기 판이었다.

미국은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처벌을 최소화하고

전후 배상 부담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극동전략기지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파격적인 특혜를 주어

주권을 회복시키는 대신,

일본을 대소 전초기지로 삼는

전후 동북아 대립 구도를 완성했다.

미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고통 받은 한반도를

강화조약 배상 대상에서 제외할 때

이승만은

그가 당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한다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낸 것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은 대일 강화조약이

미국의 극동 전략 수립에서

핵심 사항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침묵한 것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 몰빵에 몰두한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은 정전 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과 체결했다.

동시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치외법권적 특권인 ‘권리’로

인정해주면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은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유엔사 후방기지 협정으로

동북아 전략의 기본 틀을 완성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최종 보루로 만드는 작업을 마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전범 처벌을 흐지부지하고,

한국에서 친일세력을 복권시켰으며,

막후 정보 공작(CIC, CIA)을 통해

한국과 일본 내의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척결했다.

미국 정보기구 G-2 부장인 윌러비 소장은

맥아더의 눈이자 귀이자 손이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였다.

그는 악명 높은 특고경찰을 중용했다.

일제강점기 사상범을 탄압하던 비밀경찰이었고

독립 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자들이었다.

윌러비는 그들을 비밀리에 공직에 복직시켰다.

낡은 술을 새 병에 담았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을 잡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휘하에서 다시 총을 들었다.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는 남한에서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세력이

권력기구로 복귀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952년 미국의 일본 미군정 종식을 앞두고

일본 극우 세력이

미군 정보기구 G-2의 묵인·개입 하에

일본의 재무장을 노린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발각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일본 내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고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거점으로 묶어두기 위해

자민당 정권과 온건 야당 분열 공작에

수백만 달러의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

1955년 이래 2021년까지 단 두 번의 예외뿐,

자민당의 집권, 미국의 그림자 아래 이어졌다.

CIA가 만든 정당, 미국이 유지한 정권.

일본 민주주의의 이면이다.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정책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소련과 사회주의, 동북아에서 저지하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를 안았으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경감되고 미국 기지가 되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1952년 미군은 오키나와에 남았다.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3각 군사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후방기지, 한국은 전방기지이고

유엔사와 그 후방기지가 둘을 연결한다.

미국은 동북아를 하나의 군사작전 공간으로 재편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워싱턴이 있다.

이 모든 일이 소련을 막는다는

하나의 명분 아래 만들어졌다.

진짜 목적은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거였다.

동북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만들어

한반도를 그 패권의 최전방기지로 삼는다.

그 설계는 1945년 이후 7년 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설계 위에서 한반도가 살고 있다.

2026년 미국은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으로

중국과 인도, 태평양까지

작전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3각 군사협력체제가 더욱 강고해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자주와

전작권 환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와

어떤 관련 속에 이뤄지는지

국회, 언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70 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미맹에 모두 취해 있는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418 2026.06.11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3- 태평양 종전과 미군정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는

도시를 그림자만 남긴 채 태워버렸다.

아이들의 울음은 증발했고

강물에는 불탄 인간의 형상이 떠내려갔다.

그곳에는 일본인만 있지 않았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핵의 불길 속에 버려졌다.

소형차 크기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5만 명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착취당하던 조선인이었다.

일제 군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날의 태양보다 뜨거운 빛 속에서 산화했다.

해방을 갈망하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희생자가 되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 외무상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다 말했다.

"내일부터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이틀 후, 소련군은 만주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동군 100만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탄 '팻 맨'이 두 번째로 떨어졌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포고 다음 날,

소련에 대한 사전 통보 없이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더 이상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압박용 메시지였다."

미국은 스탈린을 굴복시킨,

막강한 소련을 두려워했다.

소련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해

소련을 압박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두 도시의 피해는 엄청났다.

현장 사망 23 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 만 명.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조선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일본 원폭 투하 후 피폭자에 대한

보도와 정보 유출을 매우 강력하게 통제했다.

1945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관(GHQ/SCAP)은

일본 전역에 엄격한 언론 규제를 시행했다.

원폭 관련해서 특히 심했다.

원폭은 일시에 한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생존한 피폭자들의 고통이 심했다.

갖가지 형태로 부상을 당했지만

치료받을 수 없었고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고통 속에 죽어갔다.

병원과 같은 구호시설과 식수와 식량 수급 시스템이,

교통과 통신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

완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폭 피해를 압축한 문장이 생겨났다.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했다.”

미국은 피폭 현장 취재부터 철저히 봉쇄하고

피폭 영상 자료는 압류하고 기밀로 분류했다

미군이 촬영한 뉴스릴이나

일본 영상팀이 촬영한 필름은 모두 압수했다.

필름 일부는 약 40년이 지나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피폭의 생물학적 피해는

일본 국민에게조차 철저히 차단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의 의학 연구 결과물까지도

발표가 금지되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도 검열 대상이었다.

검열 통제는 점령이 종료된 1952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원폭 투하의 참혹함을 감추고

전쟁을 끝낸 인류애적 무기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미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집중 보도토록 하면서

미국의 반인륜적인 원폭의

참혹한 파괴력을 철저히 감추었다.

미국식 합리주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정부가

항복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 25사단은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련 해군은 북동부 한반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8월 15일 미군 지휘부는 종전 후의

동북아 전략을 매듭짓고

소련에 공식 통고했다.

"한반도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으로 한다."

스탈린은 수락했다.

원자탄의 위력 앞에서,

그는 한반도 남쪽을 포기하기로 선택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통보했다.

항복을 선택하고 저항을 접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천황의 떨리는 육성이 라디오를 타고 흐르며

삼천만 동포가 거리로 뛰어나와

눈물겨운 "만세"를 외쳤다!

한반도 전역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해방이다!”

태극기를 꺼내 들었고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환희 뒤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이미 각자의 진주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에서 내려왔고 미군은

남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해방의 주인공은 승전한 제국들이었다.

그것은 잔혹한 분단의 출발점이었다.

삼천리강산은 이미 차가운 냉전의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미국이 종전 이전부터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미국은 종전 수년전부터

동북아를 주목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본이 무너지면, 미국은

동북아 어디를 차지할 것인가”

그 질문 속에 한반도가 끼워 넣어졌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익숙한 땅이었다.

그것은 미 국익을 위해 점령해야 할 대상 이었다.

1945년 6월 전쟁이 끝을 향해 가자

미국의 극비 문서 속에

일본, 만주,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점령대상으로 포함됐다

서울도, 개성도, 군산도 ‘점령 대상’이었다

1945년 8월 중순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 후

소련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 북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소련은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 여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켰다.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기세였고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해 평양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38도선을 넘지 않았다.

미국의 핵 위협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주력부대는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일본 본토 점령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 점령을

소련이 너무나 쉽게 수락한 것은,

미국이 쥔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기가 꺾인 탓이었다.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더는 남하하지 않았다.

38도선 이남에는

일본군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미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모습은 세계 1,2 차 대전 때

연합군내에서도

점령지역 쟁탈전 등이

심각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만큼 미국 핵폭탄에

크게 주눅이 든 탓이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태평양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5년 9월 4일 하지 중장 부대의 선발대가

항공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그들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45년 9월 8일 24군단이

인천항에 발을 들였다.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하지 중장은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조선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해방을 기다린 35년.

그 끝에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점령이었다.

조선민중은 광복을 외쳤지만

강대국은 점령을 준비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 중장과 T.C. 킨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갔다.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닌

다른 외세의 상징, 성조기였다!

미군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해방 직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도

그 어떤 정치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일제 총독부의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앉혔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한반도를

더 잘 알았다는 이유였다.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계속 근무했다.

일제치하에서 동포의 피를 빨던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원래의 권좌로 복귀시켰다.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의 역사적 기회는

그렇게 점령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묻혀 버렸다.

서울의 미군정에는 한국어 통역군인이 전무해서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조선인 전쟁포로 6명을

통역사로 배속시켰다.

워싱턴 정부는 서울의 미군정과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과 남한에 동일한 군정원칙이 적용된다.

친미파를 양산하라.

미국익을 위해 철저히 복종할

자들을 군과 경찰로 등용하라.

남한에서 친일세력을 친미세력으로 만들어라.”

미국 정부는 동북아에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을 방패로 삼으려 했고

군정사령관도 본국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할

야전군 사령관들을 기용했다.

정무적 감각이 있는 장군들은 배제한 채

동북아를 미국 진지로 만들려는

전략에 맹종할

군인들을 앉힌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처럼 보였다.

미군정은 해방된 민족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패전국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우리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원하지 않는다."

1946~1947년, 38도선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남과 북의 균열은 더 깊어졌다.

북쪽은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이

중심이 된 통일 전선을 구축했다.

남쪽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익 세력이 결집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던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약속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념대립의 대 혼돈 속에 한반도는

좌우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탁통치 합의가 불발되고 1947년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고 유엔 감시 아래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은 반발했다.

"38도선 전체에서 동시에 선거를 치르자"고 맞섰다.

미국의 단독 총선거 강행에

이승만과 친일파가 적극 지지하면서

남과 북은 분단의 비극을 향해 치달았다.

서로 다른 이념 속에 불신이 쌓였다

하나는 자유를 말했고

하나는 해방을 말했지만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같은 언어로 욕하고 같은 땅에서 죽어갔다

미국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저지라는

거대한 성벽만을 쌓아 올렸다.

조선인의 독립 열망은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전략 앞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제주 4.3항쟁이 일어났다.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외침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름다운 탐라의 섬, 한라산의 붉은 흙은

미군과 조선인 군경 토벌대의 칼날 아래 숨져간

3만여 무고한 주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비공식 기록은 그보다 훨씬 많다.

제주의 피는 단독정부의 초석 아래 흘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성조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그 태극기는

38도선 이남에서만 펄럭였다.

북쪽에서는 한 달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탄생했다.

서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을 모시며

같은 산천을 노래하던 민족은

두 개의 체제와 두 개의 군대와

두 개의 미래로 나뉘었다.

드리는 말씀

연재하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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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 2026.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