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나에게 바람을 쐬어 준다며 4·19탑이 있는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로 차를 태워 갔다. 차를 입구에 세우고 근처에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있는 길을 둘러보고 있었다. 새소리는 청량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는데 어디선가 새끼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가까운 경비실에서 한 아저씨가 나왔다.“어미
- 김유리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어느 여름날 아빠는 나에게 바람을 쐬어 준다며 4·19탑이 있는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로 차를 태워 갔다. 차를 입구에 세우고 근처에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있는 길을 둘러보고 있었다. 새소리는 청량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는데 어디선가 새끼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가까운 경비실에서 한 아저씨가 나왔다.“어미
세상에는 재밌는 일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빠지면 서럽다 할 것 중 하나가 서리다. 서리란 떼를 지어서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몰래 훔쳐먹는 장난을 말한다. 콩, 고구마, 참외 등이 주된 목표물이었다. 콩은 불에 구워 먹었다.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입 언저리와 얼굴도 온통 까매졌다. 고구마나 참외는 풀밭이나 바지에 문질러 흙을 닦아낸 다음 이빨로
오전 9시 40분. 빗방울이 굵게 쏟아 내리고 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흠뻑 젖은 채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다. 그녀는 키가 작고 가냘픈 모습이다. 여기는 하남 덕풍교 아래 당정 뜰 공터에 텐트로 친 임시 막사로 된 보급소(Check Point, CP)이다. 그녀는 들어오자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후 바로 책상 위 등록 명부에 서명하고 있다.
그녀는 시골 부잣집 10남매 중 넷째딸로 태어났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중매로 산골 마을로 시집을 갔다. 당시 남편은 스물다섯. 그때가 1947년으로 6·25를 3년 앞둔 시점이었다. 시댁은 시부모 두 분과 시누이 둘, 시동생 둘과 조카들까지 있는 대가족이었다. 결혼 다음 날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빨래를 했다. 세탁기가
음식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싸우던 가족들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단체 웃음이라는 작품을 빚어내니까. 먹은 후엔 힘내서 또 싸울지라도. 그 음식이 우리 친정에서는 김치만두다.부모님은 당신들과 종신토록 함께할 큰오빠가 십 대에 가출하자 여섯 오빠 중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됐던 다섯째 오빠에게 의지하셨다. 따라서 그의 위치는 그가
긴 여운의 풍경 소리에 암자 경내 분위기는 한층 경건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산사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새해를 맞은 갑진년(甲辰年) 첫날 아침. 강원도 홍천군 첩첩산중, 사방이 산마루에 둘러막혀 파아란 하늘만 빼꼼이 쳐다보일 뿐, 매서운 칼바람도 숨죽인 듯 적막감이 감돈다. 눈보라가 몰고 온 강추위에 기온은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졌고, 며칠간 쏟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묵묵히 말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다는 것. 마음에 상처를 가두어 숙성, 발효 과정을 거쳐 그 앙금을 쌓아놓는 일. 그리하여 어두운 터널을 자박자박 걸어 어둠을 헤쳐 나올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일이다.빛 바랜 어둠이 내려오는 듯한 눅눅한 벽지가 눈에 거슬린다. 오늘은 기어이 도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배
시문학을 공부해오던 문우들과 도쿄로 3박 4일 문학기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설렘이 가득했던지 우리 일행은 네 시간 전에 공항에서 만났다. 단체 관광에서 재미있고 유익한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동행인 간의 배려와 유능하고 친절한 가이드의 역할이 필수적이다.가이드와 동반하는 여행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지만, 안내판을 들고 마중
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를 반 시간 남짓 타박타박 걸어가면 아버지가 일하시는 언덕배기 위 갈가뫼기 밭이 나타났다. 어머니가 싸 주신 아버지의 점심이 담긴 베보자기는 제법 무거웠다. 저만치 소나무 아래서 햇볕을 쬐던 꿩 한 마리가 내 발자국 소리에 푸드득 날아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불렀다.소나무 그늘에 앉아 베보자기를 풀었다. 아버
동창생 호원이는 국민학교 때 나와 같은 반으로 짝꿍을 했던 친구이다.귀향을 하고 친구들과 소통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등산을 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은 늘 늘었다 줄었다 한다.등산하는 날이다.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냈던 친구도 같이 산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몇십 년의 세월이 어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살아온 이야기와 어릴 적 이야기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