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길게 하품하던 날산그늘이 마을에 내려앉을 무렵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밭으로 갔다김장 배추와 무를 심는다며흙을 가르던 손길햇빛보다 뜨거웠다태양이 녹아버릴 것 같은 오후소 끌려가듯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첫서리 내리던 날땅속에서 하얗게 건져 올린 무그 속엔 아버지의 땀이 스며 있었다 토굴 속에서 겨울을 나며가족의
- 조갑숙
여름이 길게 하품하던 날산그늘이 마을에 내려앉을 무렵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밭으로 갔다김장 배추와 무를 심는다며흙을 가르던 손길햇빛보다 뜨거웠다태양이 녹아버릴 것 같은 오후소 끌려가듯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첫서리 내리던 날땅속에서 하얗게 건져 올린 무그 속엔 아버지의 땀이 스며 있었다 토굴 속에서 겨울을 나며가족의
깊은 속은 전시되지 않는다 불을 켜도 빛은 겉면의 거친 살결에서 꺾이고 안쪽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어둠으로 남는다 수면 위로 몇 개의 문장을 던져보지만물결은 옆으로만 번질 뿐바닥에서 건져 올린 기척은 없다 입술은 얼어붙은 선(線) 아래 묶여 있고침묵은 잘 달궈진 쇠처럼 단단하게 입을 닫는다 나를 향한 고백은 늘
삶의 전통주 추억의 주전자 향기는지역을 퉁치고 전국으로 날아향기롭게 만인을 유혹하며 반긴다 희로애락 미지의 삶에일과를 마치고 온 누리에 퍼지는 한잔의 향기는 행복의 꿈길로 항해 길에 고추바람 잠재우며사계절의 꽃들은 향기롭게희망의 가곡을 노래하고 결혼과 출산, 생사의 인생길에약주는 사전에 가득한 역사의 향기 꽃길만
벚꽃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해 글쎄빵 터진 웃음아니면분칠한 얼굴아니면그 여자의 살빛아니면그렁그렁한 눈물아니면허공을 나는 나비 떼 아니면곱디고운 분노아니면밤하늘에 쏘아 올린 폭죽 아니면못자리에 낳은 개구리알 아니면땅에 떨어진 찬란한 죽음 아니면술아니면유혹아니면아니면화려한 딴따라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만면에 구김살 하나 없는 가만한 웃음은 달빛처럼 주위를 밝힌다 대학 졸업 60주년 행사에 팔십 중반의 노부부가 미국에서 머-언 길을 이렇게 찾아왔다 비는 끈질기게 퍼붓는데 저 부부의 얼굴에는 비 그칠 무렵 꽃이 내뿜는 젖은 향기가 떠나지 않는다 젊은이 둘이 계단을 내려주니 노년의 남편 L동기가 익숙하게 밀고 숲길을 나선다 빗속을 걸어
들판의 무위예술의 각도기 0번출구비단 산책로 길을 오른다 모진 바람에도상처를 키운 향기저토록 환한 속눈썹 보오 춘풍 바랑에겹겹이 두루고 선 꽃의 기억이 내 웅이를 끌어안네 서정적 멋과 햇불푸르게 흔들리는 시 깃발 앞들의 질투는 갈채다
새벽은 아직말을 배우지 못한 시간 골목은 밤새투명한 침묵으로 얼어 있다 동네 아짐 하나비닐끈을 손에 감고 천천히 내려선다 빙판 위에서는누구나 낮아진다발끝이 먼저 생각하고 몸이 나중에 따른다 잠깐,숨이 얇아지고 세상이 발밑에서 조용히 뒤집힌다 넘어질 듯한 순간두 팔이 허공을 스치
아주 가까운 곳에 오래된 간판이 있다오랫동안 방치한 듯건물 외벽에서 덜컹거리는 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화분에서잡초가 피고 지기를 하였는지마른 풀잎과 약간의 꽃들이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멈춰버린 과거가오래된 이름으로 덜컹거리고새들은 삼삼오오 텅 빈 거리에서 독한 술을 먹고 있다 어둠과 허름한 점방 사이에우리의 도시는 지
고수동굴은켜켜이 쌓아온 건축물이다 트렁크처럼 입을 크게 벌린적요 속으로 들어간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스트잇처럼옆새우 서식지도 보인다 햇빛 한 방울 없는 웅덩이에잠들어 있는 어둠의 발자국들 300℃ 넘는 화산 해저에서열수 분출공의 생명체들이내 심장에서 팔딱거린다 휘어지고 꺾이고 상처가 상처를 끌고 가는 투명한 기
입 밖 낯선 혀들을 꺼내기 위해입 속 낯익은 혀를 괴롭히며헝클어진 밤을 녹슨 흉기처럼 더듬거리는 너는 꺼져 가는 호흡에 켜진 조등 같고 시답잖은 꿈을 듣듯질질 끌리던 머리채마저 우발적인 익명으로 뭉뚱그리고 싶은 제복의 하품엔훼손된 적 없는 서사의 윤곽이 들리고 목격된 적 없는 어둠을 밀봉하듯합의된 아랫도리로 몰아가는 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