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껏 건너던 길에 새 신호등이 생겼다. 반가워 한발 다가섰더니 “위험하니 한 발짝 물러서세요”하고 소리를 낸다. 깜짝 놀라 빨간 선 뒤로 물러섰다. 그 후에도 좌우를 살피고 조심해서 건너라, 다음 신호를 받으라 한다. 요즘은 길을 건너는 일조차 소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주변을 둘러보면 다양한 소리들이 촘촘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 집 안에서는 밥솥이 조
- 정옥순(양천)
눈치껏 건너던 길에 새 신호등이 생겼다. 반가워 한발 다가섰더니 “위험하니 한 발짝 물러서세요”하고 소리를 낸다. 깜짝 놀라 빨간 선 뒤로 물러섰다. 그 후에도 좌우를 살피고 조심해서 건너라, 다음 신호를 받으라 한다. 요즘은 길을 건너는 일조차 소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주변을 둘러보면 다양한 소리들이 촘촘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 집 안에서는 밥솥이 조
민족의 비극인 6·25를 겪으면서 나라를 지키려고 싸운 젊은이들의 희생은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른바 전후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출생률이 높아져서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나라는 피폐해지고 생활 수준이 비참하여 오히려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을 추월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봄은 산고(産苦) 중이다. 지난가을 구절초가 만개하던 개울가 언덕배기에는 녹지 않은 싸락눈이 군데군데 자리를 지킬 뿐, 모든 게 황량하고 삭막하다. 공허만이 대지를 움켜쥐고 주위를 서성인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얇은 살얼음으로 뒤덮인 틈새를 비집고 튕겨 나온 은빛 물살의 조잘거림과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단숨에 넘지 못해 헉헉대며 용케도 빠져나온 삭풍의 소리뿐이
비가 온다. 온통 녹색 하늘이던 마당 위에 그리움을 잡아먹는 소낙비 내려, 꽁치 한 마리 은박지에 돌돌 말아 봄부터 잠자던 난로를 깨워 불을 지피고 막걸리 한 잔을 입에 넣고 꽁치 비릿한 내음으로 안주 삼아 기억의 강을 곱씹어 본다.어느 마을이든 초입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우린 성황당 나무라 부르고 나의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당연히 언제
우리 집 애완조(愛玩鳥)가 죽었다. 도서관 수업을 듣고 돌아오니 햇빛을 향해 날개 한쪽을 쭉 펼치고 있기에 일광욕하는 줄 알았다. 잠시 뒤 돌아보니 두 발을 하늘로 향하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새가 저렇게 누워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상하여 달려가 보니 새는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다. 나는 얼른 꺼내 손안에 올려놓고 심장을 마
소나기다. 밀려 들어온 바람이 창가에 둔 책을 거칠게 들추며 빗줄기가 안으로 들이쳤다. 창문을 닫다 보니 아파트 광장 한쪽 분리수거장에 검은 피아노가 비를 맞는다. 아파트 상가 내 피아노 학원 간판이 부서진 옆에 돌아보는 이 없는 피아노가 비를 맞다니. 오랜 세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던 서툰 손길들을 피아노는 아직도 기억할지 모르는데 오늘은 혼자 비에 젖
얼마 전, 세월의 추가 오십여 년 전으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 1950년 6·25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1961년 박정희 군부가 정변을 일으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가꾸세∼.”지금은
워킹 맘이라면 누구나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으리라. 일과 가정,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교육이냐 생존이냐 하는 지난한 이 문제 앞에서 한 번쯤은 동동거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나는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십여 년 넘게 상담실장으로 근무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의 세태와 정서를 여느 엄마들보다는 좀 더 많이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열세 살 정아의 피부는 유난히 검고 거칠었다. 양쪽 귓불이 살짝 보이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는 항상 헝클어져 있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참 예뻤다. 쌍꺼풀이 굵은 눈엔 물기 먹은 검은 포도알이 또랑또랑 빛났다. 체구는 작아도 당차고 손재간이 야무졌던 아이, 정아네는 일곱 식구였다. 정아의 아버지는 철길을 보수하는 막노동을 했고, 정아의 엄마는 미군부대
가슴을 울리는 말 한마디는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감싸고 안아주는 포용과 포옹의 말이다. 우리를 껴안아주는 진실한 말 한마디다. 진실한 말 한마디는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되기도 한다.시들지 않는 꽃다발을 걸어둔 것처럼‘교수님 안녕히 계세요.’‘교수님 잊지 않겠습니다.’‘여성을 보는 시각이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