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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고철과 꽃

강한 것과 연약한 것의 대비를 본다. 상호보완 관계라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전혀 없을 듯한데 그 중심에 자리한 공생을 본다. 억세고 강하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고철의 본질에서 이성을 발견하고, 여리디여려 작은 충격에도 쉽게 꺾이는 꽃의 본질에서 감성을 발견한다면 억지일까. 이성과 감성. 두 성질의 분배가 사람에게 균등하게 주어질 때 참된 인간성이 성

  • 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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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꽃바람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이다. 담장의 능소화는 초록빛 운동장에 붉은 물감을 붓끝에 흠씬 눌러 찍은 듯하다. 걸음을 멈칫하고 마주한 꽃이 교정 벤치에 나란히 앉아 팔을 걸고 사진을 찍었던 친구들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며칠 전 고향 친구를 만난다며 무궁화호 왕복권을 폰에 저장하고부터는 벌써 동면하던 의식이 눈치를 채고 스멀거리며 학교 앞 들녘을 가로지른 지평선과

  • 김형숙(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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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지는 해의 아름다움

어머니는 한껏 차려입고 학교에 가는 나를 보며 “내도 마음은 니하고 똑같다” 하셨었다. 그러면서 어머니 눈에는 내가 예뻐 보였는지 등교하는 나를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서서 바라보시곤 하셨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며 위에 계시던 어머니께 손을 흔들고 등교를 하곤 했는데 그 당시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 김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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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자전거 타는 인생사

7월이 오면 강변도로에는 자귀나무꽃들이 지천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만개해서 산책 나온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마치 수많은 공작새가 화들짝 날개를 펼치면서 화려한 예술의 미와 기예를 뽐내는 듯이 그 광경은 실로 환상이다. 이곳은 자전거 전용도로이며 시내 초입에서 금광호수로 가는 나들목이다. 자귀나무꽃이 100미터 이상 터널을 이루고 나머지 5킬로미터는

  • 김기덕(일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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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황사가 불던 날의 땅끝마을 여행기

올 들어 최악이었다는 황사가 전국을 누런 흙먼지 속에 가두어 버리던 날. 황사주의보를 귀담아듣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모처럼 떠나는 주말여행에 모두 들떠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몸단장에 열을 내는 아내는 물론 막내딸 녀석도 벌써 지도를 펼쳐보며 목적지까지의 제일 빠른 길 찾기에 바빴다. 우리 부부가 벌어들

  • 고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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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어제, 내일

*기억은 스냅사진과 같고, 변형은 왜곡된 기억이나 보정된 사진과 같다. 망각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 꺼내보지 않는 사진과 같지 않을까?나에게는 서른일곱 살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10살 되던 해 3월 30일, 아버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오늘은 사라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추위가 꺾이고 코트를 벗어버릴 때쯤이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회사

  • 김명진(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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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꽃샘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사월 하순인데도 바람 때문인지 제법 썰렁하다. 주공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니 벽에 붙은 붉은 현수막이 바람에 춤을 춘다. 지역신문에서 이 아파트가 곧 헐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인데도 길을 나섰다. 그리 먼 곳이 아닌데도 차를 타고 지나가기만 했지 직접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산한 분

  • 최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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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뻐꾸기시계

벽시계가 졸고 있다. 신혼집들이 선물로 받은 뻐꾸기시계다. 지금은 집마다 시계가 서너 개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삼십여 년 전에는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급전이 필요할 때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면 가격도 톡톡히 쳐주는 귀한 대접을 받던 때도 있었다.색바랜 벽시계는 이제 제 몸조차 지탱하기 힘겨워한다. 거실에서 검붉은 녹이 내려앉은 못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건

  • 이장희(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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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6월의 오후

나른한 오후다. 세상 만물이 오수에 들었는지 고요하다. 아직 한여름은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당의 기운은 습하고 끈적하다. 무심하게 내리쬐는 햇살마저 지루하다.오랜만에 들른 시골집이다. 굳게 잠긴 현관문이 부재중인 주인을 대신해 출입을 막아선다. 낯선 이의 등장에 백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제 밥그릇도 못 알아보는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목줄에 쓸려 마른 먼지

  • 황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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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보랏빛 향수

‘오월의 보랏빛 향수.’ 초록으로 눈 뜨며 일어나는 봄. 그 유혹에 빠져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나의 텃밭 가장자리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흙을 사랑하여 텃밭을 구입했다. 들머리 가장자리에는 매화나무가 있어서 꽃샘추위에 하얀 향수를 입에 물고 벌을 유혹한다. 자연은 계절을 어기지 않으며, 꽃 피우는 순서

  • 김유진(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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