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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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햇살을 받자 바다는 반 고흐의 그림처럼 강렬한 색채로 출렁였다.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모인 젊은이들의 알몸에 가까운 피부도 남태평양 섬의 원주민처럼 붉게 물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음악 전문 케이블 <뮤직 TV>가 주최한 가요제 <썸머! 스타 탄생!>의 공개 녹화가 펼쳐졌다.
“앗, 드디어 나타났군!”
심사위원장인 작곡가 승우는 하마터면 큰소리로 외칠 뻔했다. 벌써 두 시간 넘게 진행되었으나 대학 축제 가요제만도 못한 오합지졸의 경연장이었는데, 마지막 출연자가 승우를 충격과 전율에 빠뜨렸다.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청바지와 몸에 착 달라붙는 순백의 쫄면 티를 입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방금 바닷물에 빠졌다가 달려온 듯 흠뻑 젖은 모습이라니! 녀석은 그렇게 섹시한 모습으로 이승철의 <소리쳐>를 그야말로 소리쳐 불렀던 것이다.
많이 생각날 텐데! 많이 그리울 텐데!
많이 힘겨울 텐데! 많이 아파올 텐데!
눈을 감아 보아도 너만 떠오를 텐데!
정말 보고 싶어서 그냥 혼자 소리쳐!
널 가슴에 품고 난 살아가겠지!
서로 모른 척하며 서로 잊은 척하며
가지 말라고 소리쳐! 가지 말라고 말했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너만을!
돌아오라고 소리쳐! 돌아오라고 말했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너만을 소리쳐!
처음에 녀석의 해괴한 의상과 색기 넘치는 몸매에 끌렸던 관중들의 시선은 어느덧 그가 부르는 열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해풍처럼 끈적이는 목소리로 소화해 내는 가창력이 우선 귀를 붙잡고, 탤런트가 연기하듯 처절한 표정과 몸짓이 문득 승우를 소름 끼치게 했다. 그런 경험은 아주 가끔이지만 승우가 작곡한 노래를 오디오형의 기성 가수가 아주 완벽하게 불러 줄 때도 지금처럼 등골이 오싹하면서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승우 씨 어때요? 대상감이죠?”
이때 심사위원인 옆자리의 작사가 혜미가 속삭이듯 건네왔다. 하지만 승우는 이런 엉뚱한 대꾸를 했다.
“대상? 천만에! 난 인기상도 안 되겠는데…!”
“보세요! 저 가창력에 음정! 박자! 매너! 청중의 반응까지… 그런데 승우 씨 심사 기준은 뭐죠?”
“그건 심사위원장인 내게 맡겨 주고, 혜미 씨는 나만 따라서 점수를 비슷하게 맞춰 줘요!”
“알았어요. 제가 유명 인기 작곡가인 승우 씨와 콤비를 이어 가려면 무조건 양보해야 되겠죠? 하지만 혹시 심사에 불공정이라고 난동이 벌어지면, 그땐 책임을 지셔야 해요!”
“물론, 그래야 저 녀석을 살릴 수 있으니까.”
승우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대꾸하자 혜미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대상 먹어서 케이블 몇 번 타 봐요! 저 녀석을 노리는 기획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거구! 허파에 뻥 바람이 든 녀석은 결국 반짝스타로 사라지겠지?”
“그래서요? 인기상도 안 주어 쟤가 절망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땐 어떡하려구요?”
하지만 승우가 이에 대답을 하기 전에 녀석의 <소리쳐>가 끝나서 곧 점수를 매겨야 했다. 녀석은 가요제의 출연자답지 않게 박수와 아우성이 범벅인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무대 뒤로 사라졌다.
“으음, 바로 저게 감점 요인이야!”
승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8자에다가 0을 보태서 80점을 만들어 녀석의 채점을 마쳤다. 그리고 데뷔한 지 몇 개월 만에 얼마나 돈맥질을 쳤는지 갑자기 인기가수로 떠오른 아이돌 그룹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오늘 태양처럼 빛나는 젊음의 샛별을 찾기 위하여 음악 전문 케이블 <뮤직TV>가 주최한 <썸머! 스타 탄생!>! 그럼 인기 작곡가이신 유승우 심사위원장님의 심사평을 듣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MC의 소개가 끝나자 너무도 유명한 작곡가 승우이기에 마치 인기가수처럼 큰 박수를 받으면서 무대로 나갔다.
“출연자 모두 노래 참 잘하셨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다 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단순히 노래자랑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썸머! 스타 탄생>, 즉 가수가 될 신인을 발굴하는 가요제입니다. 따라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보다는 가수가 될 사람! 다시 말해서 첫째 남의 흉내가 아닌 자기만의 ‘개성’이 있어야 하고, 둘째 단순히 꽃미남 꽃미녀보다는 역시 자신만의 ‘매력’이 있어야 하며, 셋째 가장 중요한 조건은 가수가 되려면 ‘혼’이 담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다른 가수의 기막힌 모창으로 환호를 받거나, 벌써 가수가 된 듯이 관객에게 손을 흔드는 겸손치 못한 매너는 감점의 요인임을 참고로 말씀드리면서 심사평을 마치겠습니다!”
승우의 이론과 말솜씨가 워낙 유창해서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쏟아냈다. 이어서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자, 우린 이만 자리를 뜹시다!”
이윽고 승우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서자 혜미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호호, 역시 마지막 녀석 땜에 겁이 나시는 거죠?”
“천만에! 주최 측에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요? 심사료요? 케이블인데 얼마나 주겠어요? 피서여행 한 번 잘 온 셈 치자구요! 호텔까지 잡아 줬잖아요. 호호호!”
혜미는 무엇을 기대하는지 활기차게 말했다. 하지만 승우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만 체 바삐 무대 옆의 행사 담당자 앞으로 다가갔다.
*
“이건 완존히 사기야. 씁새들!”
“맞아, 록후가 얼마나 잘했는데? 관중들이 숨을 멈추고, 파도까지 침묵했는데….”
“근데 심사위원장이란 새끼 말야. 지가 인기 작곡가면 다야? 록후를 아주 묵사발 만들었잖아.”
“그래, 짜식이 어느 출연자한테 돈 쳐먹었다구! 그래서 그놈을 입상시키려구 그따위 악평을 늘어놓은 거야. 안 그래?”
애꿎은 맥주잔으로 탁자를 탕탕 치면서 친구들이 중구난방 떠들어 댔다. 그 순간 록후는 술병과 안주가 놓여진 탁자를 더욱 세게 치면서 소리쳤다.
“다들 시끄러! 내가 노랠 잘 못했다구. 모창에 겉멋만 잔뜩 들어서 건방지게 까불었다구!”
“깜짝이야. 짜슥이…. <소리쳐> 부르더니, 정말 되게 소리치네.”
“그래? 그럼 아예 저기 바닷물에 뛰어들어라! 그래야 네 직성이 풀리겠다면….”
“정말 록후 이 짜슥은 항상 잘 나가다가 요렇게 개념이 없어지는 게 탈이야. 네 노래가 어떤데? 우릴 미치게 하잖아?”
“맞아, 게다가 죽여주는 몸매! 그냥 남자끼린데도 이 매력적인 몸매는 어떻구?”
하지만 친구들은 더욱 록후를 향해 지껄여 댔다. 한심한 놈들! 이런 결과를 예측 못하고 트로피를 술잔 삼아 해변의 호프집에서 밤새워 축하주를 마실 계획을 세웠다니…. 록후는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서 새로 가져온 2000CC짜리 피쳐를 번쩍 들어 가득 담긴 호프를 입 안에 쏟아부었다.
“으응? 바다에 빠져 죽기는 싫고, 술독에 빠져 죽고 싶다 이거구나. 그래, 마셔라! 엉터리 심사위원장놈 만나 억울하게 떨어졌으니까, 오죽 원통하겠니?”
한 친구가 위로랍시고 건네온 말에 록후의 분통은 기어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탁자를 뒤집어엎으며 악쓰듯 소리쳤다.
“모두들 꺼져! 누굴 놀리는 거야? 약을 올리는 거야? 실력 없어 떨어졌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조용해야 하는 거 아냐? 이 짜슥들아!”
“허참, 록후 저 자슥 정말 취했나 보다. 술주정이 장난 아니네.”
“그래, 취했다! 아니, 죽도록 취하고 싶다… 으흐흑!”
다음 순간 록후는 울음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서서 어두운 바닷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러자 친구들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저 자슥 저러다가 일 내는 것 아냐?”
“걱정 마. 쟤가 노래 때문에 절대 무슨 짓 할 놈이 아냐!”
“그래, 지금 저 자슥 기분 이해해. 내버려 두자구.”
‘맞다 친구들아! 걱정 마! 난 가수가 되려고 부모님과 외국 생활도 버렸어.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쓰러질 순 없어. 이제부터 시작인 거야.’
록후는 밤바다의 파도가 가쁜 숨을 내뿜는 곳까지 걸어가며 눈물을 닦았다. 이때 핸드폰의 벨이 자지러지듯 울렸다. 친구들의 소재 파악인 것 같아 신경질적으로 받았다.
“먼저들 자라구, 난 좀 더 있을 거니까!”
“아, 아까 가요제에서 <소리쳐> 부른 민록후 학생 맞아요?”
‘하아, 이건 누구야? 바로 그 사람이잖아! 나의 꿈을 한마디로 묵사발 만든 심사위원장 유승우란 인기 작곡가.’
록후는 취한 중에도 사냥개 같은 청력을 발휘했다. 담박에 그가 승우임을 감지해 낸 것이다.
“네, 그런데요? 근데 내 핸드폰을 어떻게 알고 전화하셨죠?”
순간 록후는 마음과 달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주최 측 행사 담당자한테… 미안해요, 지금 어디 있어요?”
“왜요? 제가 죽을까 봐서요? 맞아요! 지금 자살하려구 바닷가에 나왔어요! 바로 유명 인기 작곡가 유승우 선생님! 당신 때문에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록후는 아까 사무쳤던 자책과 반성의 마음은 사라지고, 이런 엉뚱한 폭언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저만큼에서 핸드폰의 뚜껑을 닫으며 승우가 뛰어왔다.
“민록후! 정말 내가 한 심사평 때문에! 아니 가요제에서 입상하지 못했다고 죽으려는 거야?”
“그래요! 지금까지 저에게 음악은… 아니 노래는 목숨과도 같았다구요! 그런데 당신이 판정을 내렸잖아요? 저의 노래는 모창에 불과하구… 겸손치 못해 자세부터 틀려 먹었다구요! 으흐흑!”
그런데 말은 이처럼 악랄하게 퍼부으면서도 울음은 왜 또 터져 나올까. 그랬다. 록후는 지금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누군가의 위로가 받고 싶어졌다.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유명 인기 작곡가인 유승우 선생님이 이제라도 “아냐, 넌 노래할 수 있어!”라고 한마디만 해 준다면, 그냥 그의 가슴에 안겨 버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승우의 입에선 전혀 상상을 초월한 명령이 내려졌다.
“민록후! 네게 노래가 목숨이었다구? 그런데 나 땜에 떨어져서 죽으려 했다구? 그럼 어서 죽어! 내 앞에서 죽어보란 말야!”
“네? 그 말씀 정말이세요? 정말 날더러 죽으라구요?”
‘아, 잘 됐다. 그냥 혼자 남몰래 죽기엔 너무 억울했는데, 나를 죽게 한 장본인 앞에서라면 잘 됐지 뭘! 저 바다에 빠져 죽자!’
순간 록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승우는 이를 멀건히 바라볼 뿐이었다. 좀 더 파도가 거세어진 밤바다는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지만 반갑다는 듯 얼른 품어 버렸다. 짭조름한 바다의 물거품이 록후의 목을 넘어 입가에 튕겨질 때 갑자기 노래가 튀어나왔다.
많이 생각날 텐데! 많이 그리울 텐데!
많이 힘겨울 텐데! 많이 아파올 텐데!
눈을 감아 보아도 너만 떠오를 텐데!
정말 보고 싶어서 그냥 혼자 소리쳐!
그런데 아까 가요제에서는 가사 내용이 연인을 대상으로 했는데, 지금은 바로 록후 자신이라는 깨달음에 갑자기 눈물이 났다. 노래에 대한 생각! 노래에 대한 그리움! 노래를 못하는 힘겨움! 노래를 버려야 하는 아픔! 차라리 그렇다면 영원히 눈을 감아 버리자! 그래도 떠오르는 노래에 대한 열망! 지금 난 목숨을 던져 소리쳐 노래를 부른다. 짧은 순간이지만 행복했다! 록후는 바닷물을 쿨럭쿨럭 삼키며 죽음을 찾아 허우적댔다.
“임마, 민록후! 바보같이 진짜 죽으려 했어?”
그때 멀리에서, 아니 귓가에서 누군가 소리쳐 왔다. 그리고 축 늘어진 록후의 몸뚱이는 승우에 의해 바닷가 모래밭에 건져졌다.
“아, 이 일을 어쩐담.”
이건 정말 내가 꿈 많은 한 젊은이를 죽인 게 아닌가? 승우는 헐떡이는 심장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록후에게 인공호흡을 시키기 위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너덜너덜 해진 청바지와 몸에 착 달라붙는 쫄면 티가 아까 가요제에서처럼 흠뻑 젖어 마치 알몸처럼 보인다. 저만큼 수은등 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 먹물로 휙 그은 듯한 검은 눈썹! 정갈한 이마 위로 갈색 톤의 무성한 머리칼이 바닷물에 젖어 반짝인다. 조금 높은 듯한 콧날 양끝의 야무진 콧방울! 바로 아래에 여자처럼 도툼한 입술이 하트로 그려졌고, 타원형 턱선 아래로 가녀린 목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남자라기보다 중성에 가까운 훌쭉한 바디의 균형이 일류 모델을 뺨친다고나 할까?
“민록후! 넌 살아야 돼! 그리고 노래를 불러야 해! 내가 최고의 노래를 만들어 줄게! 야, 너 죽으면 안 돼! 어서 깨어나란 말이야!”
이제 승우는 록후를 향해 울부짖듯 외치며 록후의 입술을 벌리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두 손으로는 그의 흉부에 압박을 반복하면서 때로는 배꼽 아래까지 훑으면서 그의 소생을 간절히 빌었다. 얼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록후가 큭큭 기침을 해 대면서 깨어났다.
“아, 고맙다! 록후야,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구!”
승우는 조용히 속삭이며 록후의 입술을 마지막으로 흡입했다.
*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예요? 지금이 몇 신데….”
승우가 호텔의 객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뜻밖에도 아니, 예상한 대로 혜미가 토끼눈을 뜨고 쏘아봤다. 승우는 상의를 벗어 옷장에 걸며 비꼬듯 대꾸했다.
“흥,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바가지야?”
“어머, 정말 그럴 계획이에요? 난 이대로가 좋은데…. 호호호!”
그제야 혜미가 얼굴의 경직을 풀며 다가와서 승우의 와이셔츠를 벗기려 했다. 하지만 승우는 완강한 태도로 돌아서며 말했다.
“내가 누구 동생이야? 5년 차이면 오빠도 큰오빠라구!”
“알았어요. 그럼 얼른 샤워하고 오세요. 난 오빠가 보호본능을 일으켜서… 오빤 항상 강하다고 허세부리지만 의외로 여린 면이 있잖아요?”
오늘따라 혜미가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질까. 승우는 문득 의문을 품으면서 이미 혜미가 가득 채워 놓은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그때 문득 오늘 록후와의 일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안 돼! 큰일 날 뻔했어. 만약에 그애를 이 방에 데려왔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승우는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그러자 혜미가 수면용 전등을 켜놓고 침대 위에 버젓이 나신을 드러낸 채 누웠다.
“빨리… 얼마나 기다렸다구! 흐응!”
둘만의 비밀에 익숙한 혜미는 준비절차를 생략하고 본행사를 졸라댔다. 참 대단한 계집애야! 벌써 5년 전 KMS가요제에서 대학생 출연자로 만났는데, 오늘 록후와 비슷한 사연으로 얽혀졌다.
“안아줘! 나 급해요!”
그녀는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긴 머리칼로 유방을 감추려 했지만 용감하게 치솟은 두 봉우리의 끝은 잘 익은 오디 같은 검은 알맹이가 매달렸다. 그리고 능선처럼 시원하게 펼쳐진 뱃가죽 양편을 떠받치는 골반의 관능미! 아울러 길게 쭉 뻗은 두 다리 사이의 숲에선 아침 이슬 같은 반짝임이 눈길을 어지럽혔다. 승우는 불끈거리는 몸의 재촉에 따라 서서히 자세를 잡아갔다.
“아, 벌써 나올 것 같아!”
혜미가 고양이처럼 날쌔게 승우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종알거렸다.
“흐음, 대사가 뒤바뀐 것 아냐? 여자가 먼저라니…?”
“난 그게 아니구 작품! 가사가 절로 나올 것 같다구요! 흐흐흥!”
그랬다. 승우와 혜미가 작곡과 작사를 해서 히트시킨 수많은 노래들은 거의가 언제나 이런 격렬한 섹스 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잠깐! 키스 먼저. 아무리 바빠도 상하가 있는 법인데… 호호호!”
그녀의 음란한 대화가 뻔뻔스럽게 튀어나왔고, 승우도 충실한 하수인처럼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 두 입술이 벌려지면서 혓바닥들이 반가운 재회의 스킨쉽에 몰두했다. 근데 이게 뭔가? 이건 영 아니다! 아까 바닷가에서 록후에게 인공호흡을 했을 때 느껴지던 그 떨림이 아니었다.
‘록후, 넌 깨어나야 해! 나의 이 입술로 널 살려낼 꺼야!’
너무나 안타까와 눈물로 간구하며 흡입했던 록후의 입술은 이제 생각하니 너무나 달콤했다. 짭조름한 바닷물과 입에선 아직도 술냄새가 풍겼지만 그냥 마셔버리고 싶을 만큼 황홀한 인공호흡! 아니 입맞춤이었다.
“됐어요! 승우 씨! 이젠 아래로….”
승우는 머리를 흔들어 록후로부터 벗어나며 혜미의 초대에 응했다. 벌써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숨가쁜 얼굴로 그녀가 안내했다. 그랬다. 승우와 혜미는 머리에만 얼굴이 있는 게 아니었다. 성기도 너무나 분명하게 서로를 보고 느끼고 알았다.
‘나 왔어!’
‘얼마나 보구 싶었는데?’
‘하늘만큼 땅만큼!’
그 순간 승우의 심벌은 혜미에게 정말로 하늘만큼 높았고, 혜미의 그곳은 승우에게 땅만큼 넓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둘이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합치려 했다.
“좀더 강하게 해줘! 오늘 갑자기 왜 이래요?”
그런데 땅이 불만을 토로했다. 왜 그럴까? 승우는 거의 숙달된 실력을 발휘하려 애썼다. 그때 록후가 보였다. 아직 바닷물을 먹어 기절한 채로의 모습이었다.
‘안 돼! 록후야, 넌 살아야 해! 어서 깨어나라구!’
결국 승우의 하늘은 혜미의 땅에 서로 닿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푸우 한숨을 내쉬며 승우가 그녀로부터 분리되자 혜미가 날카롭게 종알거렸다.
“정말 이상하네. 승우 씨! 좀전에 누구랑 만나고 왔어? 혹시 걔 아녜요? <소리쳐>를 부른 민록후였던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그 녀석 이름을 자기가 왜 기억하는데?”
“너무나 노래를 잘 했는데도 일부러 떨어뜨렸잖아요. 물론 이유는 얘기했지만…. 그래도 정말 이상해. 자기의 지금 모습, 넋나간 사람 같아!”
우와, 경찰! 아니 검찰! 어쩌면 국정원에 끌려간들 혜미처럼 다그치지는 않을 거다. 이건 금방 뽀록 나겠는걸! 그건 절대 안 돼! 그렇다면 혜미의 의문을 잠재우는 묘안을 무엇일까? 바로 그때 록후가 혜미와 겹쳐졌다. 바로 이거야! 록후를 살려내야 해! 우선 인공호흡부터….
“혜미, 우리 오랜만의 여행이야! 눈앞에서 멀어지면 사랑도 식는다고 그간 우리가 너무 떨어졌었나 봐! 정말 사랑해!”
혜미! 아니 록후로 보이는 혜미가 되자 승우의 심벌은 거의 발작적이 되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드라마처럼 승우의 한껏 커져버린 것이 혜미의 땅을 사정없이 유린했던 것이다.
*
<민록후, 연락 바람. 노래를 위해서야! 유승우.>
승우는 여러 날 동안 망설임 끝에 록후의 핸드폰에 문자를 날렸다. 그리고 곧 후회를 했다. 이게 뭔가? 대한민국 최고의 유명 인기 작곡가가 가요제에서 장려상도 받지 못한 낙선자에게 먼저 문자 메시지를 보내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록후가 의아해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미처 1분도 안 돼 답신이 날아왔다.
<형! 넘 기다렸어염! 어디서 만나여? 귀여운 록후가! ㅋㅋ!>
‘이 자슥 봐라! 열세 살이나 많은 나에게 형이라니? 내가 영화배우
강동원도 아닌데 그리 동안인가? 흐응!’
기분이 무지 좋았다. 그러나 지금이 찬스이면서 위기였다. 록후에게 혼이 담긴 정말 좋은 곡을 부르게 하려면 인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강한 무쇠를 만들기 위해서는 용광로에서 몇 번씩이나 담금질해야 하듯이 말이다. 너무나 쉽게 뜨거워지고 빨리 식어 버리는 게 연예가의 체질이었다. 승우는 록후에게 연락을 딱 끊어 버렸다.
<형! 뭐예요? 제 문자 받으셨나염?>
궁금증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록후 미쳐 죽는 걸 알아염? 답줘용! 해해!>
이제는 아부를 떨어 보는가 보았다.
<혀엉! 그 바다로 다시 갈래! 물귀신 돼서 형을 괴롭힐 거야!>
마침내 록후에게서 협박장이 날아왔다.
‘그래, 이젠 답신을 보내줘야지! 더 미적거리다가는 녀석이 정말로 자살할지도 모르니까.’
승우는 핸드폰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록후, 미안! 작품 땜에 여행! 유승우 형이!>
그런데 또 답신을 날리고 나니 금방 후회가 밀려왔다. 노래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녀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지만 두려운 만큼 한번 부딪혀 보자는 오기도 생겼다. 이때 30초도 안 돼 록후의 문자가 벌떡 솟았다.
<지금 안 만나 주면 형 뉴스에 나와염! 록후 죽였다구여! 아앙!>
이쯤 되면 승우로서 별 도리가 없었다. 내가 먼저 시작을 했으니까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닌가? 승우는 할 수 없이 답문자를 쏘았다.
<1호선 대방역! 뉴스타 오피스텔 707호! 유승우 작곡실!>
그런데 이런 당황스런 일이 있나? 겨우 30분도 안 돼서 록후가 승우의 오피스텔 작곡 사무실 문을 열고 짜잔 나타난 것이었다. 사내 녀석이 웬 장미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서였다.
“혀엉, 나빠요! 형은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록후가 아주 미쳐 죽을 뻔했다구요? ㅋㅋㅋ!”
록후는 온전한 한글로 표현이 안 되는 ㅋㅋㅋ 웃음을 날리며 한껏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말투는 그래도 녀석의 얼굴은 기쁨으로 넘쳐났다. 그냥 미소가 넘치다 못해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어났던 것이다. 승우는 손수 커피를 끓여 함께 마셨다. 오늘따라 커피 맛이 죽여주었다. 갑자기 멋진 멜로디가 마구 쏟아질 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커피를 마신 록후가 표정을 바꾸며 말을 꺼냈다.
“유승우 작곡가 선생님! 저 다시 노래할 수 있나요? 가수의 소질이 있냐구요?”
‘에잉? 갑자기 녀석이 정말로 미쳤나? 왜 이리 돌변하는 거야? 형에서 선생님은 뭐고 또 노래가 어쨌다구…. 바보 같은 녀석! 내가 왜 너를 이토록 애타게 찾았는데, 그따위 말을 질문이라고 해?’
승우는 뺨이라도 갈겨 주고 싶을 만큼 화가 났지만, 엉겁결에 록후의 두 손을 잡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네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는 스스로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목숨 걸고 덤비는 것 아냐? 그리고 난 그런 너에게 정말 좋은 곡을 주고 싶어서 부른 거구. 이 바보야!”
“네? 그 말 진짜죠? 록후가 가수 될 수 있다는 거 정말이죠? 혀엉!”
그러자 록후는 깡충 뛰어올라 승우의 뺨에 뽀뽀를 해 버리는 게 아닌가. 승우는 하도 기가 차서 뻥 쪄 록후를 바라보자, 그제야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에이, 형이랑 나랑은 세대차인가 봐. 형이 넘넘 고마워서 서비스 차원으로 뽀뽀 한 번 해드린 걸 가지고. 제가 더 쑥스럽잖아요. ㅋㅋㅋ!”
“알았어 임마! 그럼 가끔씩 그런 서비스 잘해야 내가 좋은 곡 써 줄 거야. ㅋㅋㅋ!”
록후한테 전염이 됐는지 승우도 ㅋㅋㅋ 웃음을 날리자 록후가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그야 당근이죠, 혀엉!”
근데 녀석은 어떻게 자랐길래 이리도 응석 체질일까? 승우는 절로 미소가 나와서 역시 록후처럼 다시 ㅋㅋㅋ 웃음을 날리며 말을 꺼냈다.
“ㅋㅋㅋ. 록후야, 너 그날 부른 <소리쳐> 말고 또 18번 노래가 있어?”
“네, 실은 이승기가 부른 <제발>을 더 좋아해요. 근데 노래가 좀 처져서 지난번 해변에서 열린 가요제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아.”
“좋아. 그럼 <제발>을 한 번 불러 봐! 반주를 넣어 줄까?”
“아뇨, 진짜 노래 실력은 무반주일 때 드러나잖아요?”
록후는 갑자기 사랑의 연인과 결별한 듯한 슬픈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잊지 못해! 너를 있잖아! 아직도 눈물 흘리며 너를 생각해!
늘 참지 못하고 투정부린 것 미안해! 나만 원한다고 했잖아!
그렇게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져 지워지는 게 난 싫어!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랄게!
기다릴게 말은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 돼! 멀어지지 마! 더 가까이 제발!
모든 걸 말할 수 없잖아! 마지막 얘길 할테니 들어 봐!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화만 내서 더 미안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헤어지면 가슴 아플 거라 생각해!
기다릴게 말은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은 안 돼!
멀어지지 마! 더 가까이! 제발! 제발! 제발!
록후가 혼신을 다하여 노래 부르는 동안 눈을 감고 경청하던 승우가 눈을 떴을 때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겨우 3분여짜리 노래를 부르는데 온몸이 땀으로 젖고, 특히 록후의 두 뺨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액체는 눈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리 많은 눈물을 계속 뿜어낼 수 있는 것일까. 너무나 애처로워서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제발! 제발! 제발!’을 부르다가 록후는 끝내 현기증이 난 듯 비틀 쓰러져 버렸다.
“야, 록후야! 왜 그래? 정신 차려!”
승우는 재빨리 록후를 붙잡아 안고 소리쳤다. 그제야 록후가 가까스로 눈을 뜨며 힘겹게 말했다.
“혀엉, 제발 나 노래 부를 수 있게 도와줘! 정말 좋은 곡 만들어 달라구요. 이 노래 <제발>보다 훨씬 잘 부를게요! 혀엉!”
“걱정 마, 록후야! 내 혼신을 다해서 너에게 꼭 맞는 노래를 작곡하고 말 거야! 그러니까 몸 관리부터 잘 해! 가수는 노래뿐 아니라 체력도 아주 중요하다구.”
“정말? 형! 진짜 나한테 최고의 곡을 만들어 줄 거야? 고마워요! 혀엉! 나 형이랑 뽀뽀하고 싶어! 이건 서비스가 아니라 진짜란 말예요!”
그리고 록후는 갑자기 어디서 기운이 솟는지 거꾸로 승우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진짜로 입술을 향해 덤벼들었다.
“너 정말로? 이건 좀….”
그때 승우가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록후는 벌써 혀까지 침범하는 딥 키스를 해댔다.
“형의 노래를 부르려면 형부터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니우? ㅋㅋㅋ!”
이윽고 승우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록후가 의외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승우 역시 조금은 어색함과 난처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살짝 열려진 작곡 사무실 문을 밀어젖히며 혜미가 느릿느릿 그러나 뼈를 박은 말투로 쏘아왔다!
“흥! 이제 본 상황은 내 상상력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네. 이봐요! 방금 둘이서 한 행동은 장난인가요, 진짜인가요?”
*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아니 박살이 나버렸다고 해야 할까? 승우는 독한 양주를 맥주 컵에 따라 안주도 없이 입안에 쏟아부었다.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잠시 정신을 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점점 맑아왔다.
“여보세요! 누군데 우리한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는 거죠?”
그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록후가 혜미를 향해 대들었다.
“뭐야? 네가 바로 가요제에 나왔던 민록후지? 너야말로 여기 와서 한 짓이 우리한테 모욕적이라구! 알았어? 자식아!”
순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혜미가 마치 바람난 남편의 조강지처처럼 악다구니를 쓰면서 록후의 뺨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혀엉, 미안해요! 하지만 진짜로 형을 사랑한다구요! 으흐흑.”
마치 그날 밤 바닷가에서럼 울음을 터뜨리며 록후는 작곡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벌써 한 달 가까이 해방불명이었다. 아무리 핸드폰을 걸고 문자 메시지를 날려봐도 소용없었다.
“이 자식,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처음엔 설마! 다음엔 걱정! 그리고 분노! 이제는 자포자기가 되었다. 그래서 오피스텔 작곡 사무실에 처박혀 술과의 전쟁만 벌였다. 그런데 오늘 밤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니까 더욱 록후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승우는 그날 록후가 부른 <제발>의 노래를 녹음해 둔 걸 깨닫고 테이프를 재생했다.
잊지 못해 너를 있잖아! 아직도 눈물 흘리며 널 생각해!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랄게!
기다릴게 말은 하지만 너무 늦어지며는 안 돼! 멀어지지 마!
더 가까이 제발!
보였다! 그 노랫속에 땀에 젖어 눈물 흘리면서 열창하는 록후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아, 그만! 그만! 록후야! 제발 돌아와 줘!”
승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바로 그때 세차게 작곡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 혜미겠지? 그녀는 유난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우중녀(雨中女)였으니까!’
하지만 여자가 두드리는 얌전한 노크 소리가 아니었다.
“누구야? 이 밤중에….”
승우는 완전히 알콜맨이 되어 비틀비틀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너무나 놀라서, 아니 하도 반가워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임마! 너 이 자식! 나쁜 놈! 정말 못된 녀석!”
승우는 헛소리처럼 내지르며 비에 흠뻑 젖어 떨고 섰는 록후를 끌어안은 채 계속 욕만 퍼부어댔다.
“형! 추워, 나 계속 밖에 세워둘 거예요?”
“그래! 어서 들어와!”
그제야 승우는 록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샤워부터 하고 옷 갈아입어야겠다.”
“알았어. 형, 미안해!”
욕실로 들어간 록후가 승우의 침대로 기어오른 건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그런데 승우가 내어 준 잠옷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알몸으로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너 이러면 형한테 혼난다. 빨리 잠옷 입어.”
“아유 참, 형은 구세대야. 난 다 벗어야 잠이 온다우. ㅋㅋㅋ!”
“그거 참 이상한 체질이네. ㅋㅋㅋ!”
“아, 난 형이 너무 좋다! 안아줄까?”
녀석은 정말 못 말리겠다. 중고 시절 단짝 친구네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잠잘 때 흔히 벌어졌던 엉뚱한 짓을 아주 터놓고 하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음 순간 승우가 먼저 록후를 끌어안았다. 맨가슴이 맞닿자 그 기분이 아주 묘했다. 서로 체온을 느끼고 살결의 감촉과 쾅쾅 울리는 심장 박동은 쾌감을 고조시켰고, 어느 부분에 피쏠림 현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승우는 군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 나 부탁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야?”
‘뭐어? 부탁이라구? 벌써 록후가 눈치를 채버렸단 말인가?’
“혀엉, 나한테 들어와 줘! 으응? 내 몸과 맘을 느껴서 좋은 곡 써달라구요! 형이라면 어떤 아픔도 참을 수 있어! 어서요!”
*
그로부터 사흘 후에 승우는 터질 듯한 영감을 주체하지 못해 컴퓨터를 열고 악보를 펼쳐서 작업을 시작했다. 다섯 줄이 그어진 오선지 위에 승우와 록후가 그날 밤 서로의 몸속에 나누었던 정자 모양의 콩나물이 순식간에 그려져 나갔다. 이때 따뜻한 숨소리가 어깨 위에 뿜어져 승우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사랑의 위기와 고뇌를 겪은 혜미가 다시 찾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벌써 록후를 위한 곡이 써졌어요? 어서 프린트해 줘요! 내가 가사를 입힐게요!”
“정말? 그리 해준다면 너무 고맙지만….”
“그 소리는 록후한테 듣고 싶은데요.”
“미안해, 혜미!”
승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일어나 그녀를 포옹하면서 뜨거운 키스를 선사했다.
“사랑하는 사이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래요. 우리가 그런 사이 아닌가요?”
다시 사흘의 시간이 흐른 후에 혜미가 승우의 작곡 멜로디에 노랫말을 담아 왔다. 그리고 더욱 싱싱하고 세련된 록후가 연습을 위해 달려왔다.
“형, 누나! 저 이젠 정말 가수가 되는 거예요? 두려워요.”
“걱정 마! 누나가 써 준 노래 제목이 뭐니? <러브 큐핏>이잖아! 이미 가수를 위한 화살이 쏘아진 거라구!”
“자, 이건 슬픈 노래가 아냐. 난생 처음 사랑의 화살을 맞은 설렘과 기쁨을 표현한 거니까 너의 지금까지 슬픈 표정은 싹 지워버리란 말야!”
“어떻게요? 이렇게…?”
‘아, 록후는 어쩌면 저런 표정을 순식간에 지어내는 것일까?’
가수가 되기 전에 탤런트나 영화배우로 뽑혀 갈까 걱정이 되었다.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 <왕의 남자>의 이준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강동원!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일우! 좌우간 세상의 꽃미남들을 모두 모아 빚어낸 듯한 모습이라고 할까? 록후는 그런 얼굴에 첫사랑의 환희를 노래한 <러브 큐핏>을 승우의 지도에 따라 한 소절씩 익혀 나갔다.
다시 6개월 후에 드디어 메이저 연예기획사의 신인가수로 스카웃된 록후의 뮤직비디오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승우나 혜미가 만난 록후가 아니었다. 특별한 의상과 코디와 안무로 무장한 록후의 노래는 겨우 3개월 만에 청소년 음악 프로에서 1위를 차지했고, 연예가와 스포츠 신문은 연일 록후의 기사로 도배질쳐졌다.
“제 이름이 특이하다구요? 제가 LA에 살 때, 아니! 엄마와 아빠가 로키산맥을 여행한 후에 제가 태어났대요! 그래서 록후란 이름을…. 제 노래를 만들어 주신 선생님들요? 다 아시는 유명 인기 작곡가, 작사가시죠! 유승우 선생님과 강혜미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인연이 됐냐고요? 아이, 그건 비밀이에요! 연예인은 신비성을 잃을 때 생명이 끝난다고 하던데요? ㅋㅋㅋ!”
인터뷰가 끝나자 록후는 모델이 워킹하듯 우아하게 무대로 걸어나와 배우보다 더욱 능란하게 요즘 1위 곡인 <러브 큐핏>을 온몸과 표정과 열창으로 폭발시켰고, 구름같이 몰려다니는 록후의 팬들은 환호와 아우성과 비명으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러브 큐핏! 러브 큐핏! 오! 아찔한 사랑의 큐핏!
나 그대가 쏜 사랑의 화살에 맞았나 봐!
러브 큐핏! 러브 큐핏! 오! 황홀한 사랑의 큐핏!
나 갑자기 온세상이 달라진 느낌이야!
이제까지 괜시리 슬픈 생각에 빠져서
반짝이는 별보고도 눈물 핑 돌았는데
지금 이 순간 마냥 나의 가슴은 기쁨에 넘쳐
지금 이 순간 왠지 나의 마음은 행복에 겨워!
러브 큐핏! 러브 큐핏! 오! 아찔한 사랑의 큐핏!
어쩐지 그대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러브 큐핏! 러브 큐핏! 오! 황홀한 사랑의 큐핏!
정말로 그대가 좋아졌어! 참을 수 없어!
*유튜브 주소창에 <러브 큐핏 얘쟤>를 검색하면 노래 영상이 나옴.